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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Mar 04. 2017

오빠가 밉다

아빠를 미워하던 오빠가,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오빠는 '호랑이'로 유명했다. 대학생이던 내게, 저녁 11시 커트라인, 11:30분 데드라인을 외치며,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10시부터 바리바리 전화를 걸어왔으니 말이다. 정작 자신은 술을 마실 때마다 새벽을 넘기고 첫차가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게 오빠의 데드라인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조건이었다. 이런 오빠의 행동은 어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방과 후면 내가 집에 얌전히 있는지 확인하고서는 책가방을 휙 던지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한 번은 집 앞에 있던 롤러스케이트 장에 가고 싶다는 내게, '거기는 위험해서 안 돼. 절대 못 가. 내가 가봐서 알아.'라며 엄마까지 대동하여 나를 못 나가게 막았다. 그렇게 오빠는 '나는 되고, 너는 안 돼'라는 원칙을 지금까지도 꿋꿋이 지켜오고 있다.


나보다 4살 위인 오빠는, 나에게 아빠나 엄마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가끔 비뚤어진 리더십을 낳기도 했는데, 하루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방에서 공부하던 내게 오빠의 코 앞에 있는 리모컨을 가져오라 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술을 하고 싶다는 내게, 한 집에 두 명이나 미대를 보내면 부모님이 힘들다며 나를 만류하던 오빠가 어찌나 밉던지. 엄마는 내가 오빠의 만행을 고할 때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나를 가방에 넣어가겠다며 떼쓰던 착한 오빠의 일화를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이야기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예뻐하는 동생을 왜 그리도 부려먹는단 말인가.



우리 오빠는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 아빠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폭군이었고, 어린 오빠는 엄마 옆에서 언제나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덩치가 커지고 철이 들수록 오빠는 아빠의 나약한 행동에 화를 내기 시작했고, 가족을 지키지 못한 채 한없이 작아지는 아빠를, 오빠는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빠의 사춘기가 지나고 대학을 가는 사이, 이 둘은 인사조차 어색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대생이 된 오빠는, 본인이 하고 싶던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등생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꼬박꼬박 장학금을 받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면서, 학기 중이든 방학 때든 틈이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어학공부를 꼭 해야겠다며, 몇 달이고 쉬는 날도 없이 막노동을 하더니, 그 돈을 모아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엄마와 나는 내심 기뻤다. 장남이라는 무게에, 항상 가족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오빠였기에, 몸은 힘들겠지만 오빠가 모든 짐을 훌훌 털고 즐겁게 생활하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오빠는 한국에 돌아오는 순간부터 다시 장남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디자이너로는 고되게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가 넉넉지 않다며, 미술을 그만두고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의 만류에도 오빠의 강한 의지는 굽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편입에 성공한 오빠는 더욱 악착같이 공부에만 매달렸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와 졸업반이던 나는, 내가 취직이 되어 독립을 하기 전까지 몇 년을 함께 살았다. 팍팍한 서울살이에 취업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꽤나 예민한 오빠와 함께 사는 것이 내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내 길을 만들어 가느라 교환학생이며 인턴활동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최선을 다했는데, 오빠는 언제나 칭찬보다 잔소리가 앞섣다. 나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오빠가 서운하기도 하고, 예전과 달리 약해진 마음으로 주위에 대한 비판만 늘어놓는 오빠의 모습에 화도 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살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부단히도 싸웠던 것 같다. 대학, 군대, 어학연수 등으로 긴 시간 떨어져 살았던 오빠와 다시 한지붕 안에 산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는 내게 버럭 화를 내며 '너는 장남이 아니라 모른다, 나는 항상 희생만 하며 살았다'며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아무도 오빠에게 희생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는데. 미술을 포기하고 다른 전공을 택한다 했을 때도, 가족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말렸던 엄마와 나인데, 이제 와서 가족 핑계를 대며 화를 내는 오빠가 밉기만 했다. 오빠는 부모님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은 오빠의 모습 자체가 불효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 내가 더 효도하는 자식이라 믿었다.



시간이 흘러 오빠와 나는 모두 직장인이 되었고, 어느새 둘 다 사랑하는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몇 해 전 사랑스러운 딸을 얻은 오빠는 한시도 조카를 품에서 떼어놓지를 못한다. 마냥 밉기만 하던 오빠에게서 자꾸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무능한 아빠를 원망하던 오빠. 착하기만 하던 엄마를 답답해하던 오빠. 그런 오빠가 아빠가 되고, 엄마처럼 착한 부인을 만나 한 아이를 키워가고 있다. 어쩌면 '장남'이라는 무게의 몇 배가 넘는 '가장'이라는 무게가 10년 전 그때처럼 오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 오빠는 나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었다. 내가 써 내려가는 가족의 이야기들이 오빠에게는 아직 상처일 법도 한데, 오빠는 괜찮다며 잊혀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적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솜씨 없는 내 글에 가장 큰 칭찬을 해준 사람도 바로 우리 오빠다. 언제나 내가 하는 것에 딴지만 걸던 사람이, 내게 칭찬을 하기 시작하자 살짝 겁도 났지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이렇게 끄적끄적 내 마음속 이야기를 적어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나 혼자 했다고 생각했던 결정의 뒤에, 오빠라는 버팀목이 있었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하면 따끔하게 혼도 내주고, 본인이 지나쳐 온 것들은 슬며시 내게 권해주기도하며, 오빠는 끊임없이 내가 넘어지지 않는지 지켜보며 내 뒤에서 함께 걸어와주고 있었다.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아직도 매일매일 이유 없이 오빠가 밉지만, 힘든 일이 생기면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오빠이다. 오빠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가 외롭지 않게, 내가 무섭지 않게 나를 지켜준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장이라는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있지만, 오빠의 표정 속에 보이는 평온함에서 나는 오늘도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 짐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새언니,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조카 지우가 있으니 오빠는 벌써 커다란 두 개의 버팀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며시 아버지의 옆에 앉아, 잔소리를 쏘아대는 엄마로부터 아빠를 지켜주는 오빠. 그렇게 오빠는 여전히 장남의 몫으로, 아빠를 이해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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