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거북』, 『슈퍼 토끼』, 유설화
어른이 되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대학교 신입생 때, 20대 중후반이 된 복학생 선배들을 보면 엄청 어른같이 보였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나니 나도 아직 사회에 나가기 무서운 큰 어린이일 뿐이었다. 회사를 가고 나면 큰 숙제가 다 끝날 것 같았는데, 사실은 입사와 함께 새로운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고, 결혼하고 아이만 낳으면 앞으로는 힘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부모가 되니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더라. 유설화 작가님의 『슈퍼 거북』과 『슈퍼 토끼』을 읽으며, 어른이 된 내 눈에 전래동화 '토끼와 거북이'가 새삼 '슬픈 이야기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리게 걷는 게 본능인 거북이의 승리도,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는 자부심으로 살던 토끼의 패배도,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며 자주 보고 경험하는 일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든이가 세네 살 즈음, 토끼와 거북이를 함께 읽었다.
"거북이가 못됐네."
"응?"
"자기가 이기겠다고, 자고 있는 토끼를 안 깨워주고 몰래 간 거잖아."
"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듯, 나는 '착한 거북이'와 '나쁜 토끼'의 이야기로 읽고 있었는데, 이든이 눈에는 거북이가 이기적인 승리자로 보였구나. 그럼에도 경기 중에 게으름을 피운 토끼가 살짝 더 얄미워 보이기는 했지만, 이든이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었다.
출판일을 찾아보니, 유설화 작가는 거북이의 눈으로 『슈퍼 거북』 이야기를 먼저 세상에 내 보냈다. 토끼와의 대결 이후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된 거북 꾸물이, 그 명성을 이어나가기 위해, 꾸물이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달렸다. 더 빨라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토끼가 다시 도전장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꾸물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경기에 임하는데, 이 책은 그 이후 다시 거북이의 삶으로 돌아오는 꾸물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행복한 꾸물이의 표정은 마지막 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거북이다운 삶을 살게 되는 부분에서야 나온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단잠에 빠지는 꾸물이. 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띠어지는 장면이었다.
이와 반대로, 거북이와의 경기에서 진 후, 세상을 등져버린 토끼. 『슈퍼 토끼』는 경기 이후의 토끼 재빨라의 삶을 조명한다. 사람들에게 '그건 실수였어.'라며 변명을 이어나가는 재빨라. 아무도 재빨라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절대 뛰지 않겠어.'라며 극단적인 결심을 하는데, 결국 재빨라는 다시 뛰게 된다. 『슈퍼 거북』에서의 꾸물이도, 『슈퍼 토끼』에서의 재빨라도 결국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이 두 이야기 모두 끝이 난다. 이야기 자체도 워낙에 흥미롭지만, 그림도 워낙 귀엽고 재미있어서 큰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읽어도 피식피식 웃음이 샘솟는 재미난 책들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한 장 한 장에 담긴 작가님의 유머코드에 키득대느라, 이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주제에 대해 크게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 살, 일곱 살짜리 아이들에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나는 처음 이 책들을 읽을 때, '우와'하는 감탄사가 나왔더랬다. 특히 『슈퍼 거북』을 읽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대부분의 어른들의 이야기 같아 크게 공감을 했었다. 어쩌다 성공을 한 사람도, 어쩌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도, 우리는 그 상황에 연연하며 가끔은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나다움'을 잃은 우리는, 내 머릿속의 '누군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답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어느 순간 무너짐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어쩌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연차가 쌓일수록 이 일이 나와는 맞지 않음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어진 일이니 열심히 해야겠다며 나를 더 밀어붙이다, 작년 번아웃 진단을 받고 지금은 일을 쉬게 되었다. 지난 몇 개월간, 내가 왜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나에 대해 숙고해 봤더니, 결국에는 '나다움'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문제였다. 나는 '마음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너무 오랫동안 머리만 쓰고 살아왔다. '머리 쓰는' 회사 안에서 나름대로 마음을 나누며 이제껏 버텨왔지만, 사실 나는 이것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두려움에 오히려 나를 더 채찍질하며 버텼고, 결국에는 하루아침에 예전의 나와 작별을 하게 되었다. 꼭 『슈퍼 거북』의 꾸물이와, 『슈퍼 토끼』의 재빨라처럼.
이 글을 쓰느라 다시 두 책을 꺼내보며 더욱더 진하게 느꼈다.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구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젊은 날 돈 되는 일을 찾아 재무일을 시작했던 김 과장님, 마케팅이 좋아 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빈번한 프로젝트 수주 실패로 어깨가 축 내려간 박 대리. 이런 분들의 책상 위에 『슈퍼 거북』, 『슈퍼 토끼』과 함께 박카스 한 병 놓아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