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담킴 Dec 12. 2019

진주 시내

@에스키모


to. 소영

안녕. 나 진섭이.

오늘 만나자고 한건 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우리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사회시간에 니랑 같은 조 되어서 같이 과제도 했었고.

앞뒤 자리로 앉은 적도 몇 번 있었지. 기억나려나?

니랑 나랑 하도 떠들어갖구

박승일 선생님께 같이 혼난 적도 있었잖아.

추억이 참 많았는데...

그런데 니랑 2학년 때 또 같은 반이 되어서

솔직히 나... 엄청 기뻤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기쁜지를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니를 좋아해서인 것 같아.


여기까지 읽고 소영은 에스키모가 떠나가게 웃었다. 진섭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었다. 소영은 웃음기를 거두고 마저 읽어 내려갔다.


니랑 같이 있으면 정말 즐겁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해서 부담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

그냥 내가 니를 좋아한다는 거지,

사귀자거나 하는 건 절대로 never 아니다. -_-;;

니도 나를 억지로 좋아할 필요 없고

그냥 이런 애가 있구나 하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글구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해.

니 대답이 궁금하다.

답장은 꼭좀 부탁할게.

그럼 이만 줄인다.

from. 진섭


다 읽은 편지를 원래대로 접으며 소영은 진섭의 표정을 살폈다. 진섭은 솥뚜껑같은 손으로 빨대 끝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소영도 말없이 앉아 파르페를 휘적거렸다.


5분 여의 정적. 카페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두 곡 정도 끝났을 무렵, 그 무거운 침묵을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진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다 읽었으면... 뭐라꼬 얘기를 해줘얄 거 아니가..”


여전히 소영의 눈은 못 마주친 채로, 애꿎은 빨대 끝만 꾹꾹 구겨대는 길고 뭉툭한 손가락.


“니이, 글씨 또박또박 잘 쓴다.”

“차암나...... 그게 다가?”

“맞춤법도 잘 지킸네.”

“칫.....”


진섭은 내내 만지작거리던 빨대로 유리잔에 남은 각얼음을 입에 가득 욱여넣었다. 볼이 각진 얼음 모양대로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퉁명스레 뱉었다.


“다 먹었으면, 인나라. 학원 가야된다.”


진주 시내 (이미지 출처: <경남일보 - 진주 로데오거리 “한때는 패션을 주름잡았다”>)


“이거. 편지. 진짜 고맙다.”


소영은 호수의 수심이 궁금한 아이의 표정으로 진섭의 검은소 같은 큰 눈을 빤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답장, 꼭 쓸게.”


그 순간 진섭은 아직 덜 녹아 큼직한 각얼음 하나를 저도 모르게 꾸울꺽, 삼켰다. 단단하고 덩어리 진 무언가가 진섭의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진섭의 뜨거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얼음덩어리의 경로가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이 새롭고 선선하고 서늘한 기운이 자신 안에 오래오래 깊이깊이 머무르리라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머리가 띵 하니 아파왔지만 진섭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래 뭐, 천천히 해라.”

매거진의 이전글 잔다리로 학원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