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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대한 마음


오늘 내가 쓰는 이 글은 아마 지금까지 브런치에 썼던 글 중 가장 개인적이고 솔직한 글이 아닐까 싶다. 나는 브런치에는 이른바 '정보값'이 있는 글만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을 제대로 기록해두고 싶기 때문에 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켠 다음에 가장 먼저 유튜브를 본다. 오늘 가장 먼저 본 영상은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이직자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영상이었다. 가장 먼저 배우 진기주 씨가 나와서, 다니던 삼성을 퇴사하고 점차 불안하지만 원하는 길로 가는 과정을 회고한다.  


진기주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나는 진기주 씨만큼 우여곡절과 큰 결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진기주 씨 못지않게 어렵게 취업을 했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서 회사에 나갈 때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첫 출근 날부터 회사에 나가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그 싫음을 견디는 마음이 어른의 마음, 사회인의 올바른 태도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결국 제대로 못 견디고 동기들 중 1등으로 퇴사했지만.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도 나는 '사회인'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퇴사하고 대학원에 가려고 결정한 뒤에도 나는 하던 일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프리랜서로 여기저기 카피를 써 주고, 심지어는 컨설팅 업체와도 일을 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면서도 한편으로 사업 기획서나 보고서를 썼고, 기업 연보를 윤문해주거나 네이밍을 해 주거나, 발표용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주는 일 같은 것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무려 '컨설턴트' 명함까지 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모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사고 싶은 것들을 사고, 조금 덜 걱정하며 생활할 수는 있었다. 내가 그런 일들을 마다하지 않으며 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은 생계가 불안했고, 고백하건대 다른 한편으로는 '공부만' 하는 학생보다 비교우위를 차지하고 싶었던 비열한 심정도 있었다. 나는 공부만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일도 할 줄 아니까, 라는 알량한 마음. 대학원에 와서 처음으로 나갔던 학교 회식에서 나는 '저 사람처럼은 정말 되고 싶지 않다'는 강사 A를 보았고(ㅋㅋ) 그 사람은 너무나 공부만 해서 사회와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이와는 별개로, 사실 알고 보니 강사 A는 사회와 격리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회의 때가 묻은 사람이었다. 너무나 사회의 때가 묻어서 비윤리적일 정도로... 이유는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강사 A를 매우 싫어한다.)


그런 마음이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했던 것 같다. 나는 공부만 하는 게 아니니까. 여러 글에서 나는 '공부만 하고 싶다'라고 줄기차게 외쳐 왔는데, 사실 공부만 하려면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냥 하던 일을 다 그만 두면 된다. 내가 그만 둔다고 해서 망하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도 왜 그만두지 않았는가? 나의 자존감이 그런 일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금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내 스스로를 '을'로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든, 일을 주십사 하고, 너무나 성실하게 뭐든지 해다 바치는 사람.


사실 나는 그제, 출강하던 학교의 사람들과 회식을 했는데,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출강 나가는 학교의 윗사람이 자신이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치 나를 위해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줄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왜 불쾌했느냐면, 상대가 나를 완전히 을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아, 저 사람은 자기가 권력을 가지고 나를 끌고다닐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구나. 내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구나. 그런 기분이 계속 들었다. 나는 단지 그 학교에 고용된 사람으로써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태도가 나를 '쉬운 사람'으로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불쾌했던 것은, 나의 논문 작성 과정에 대한 상대의 말이었다. 상대는 나와 전공도 다르고 나이도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실 나의 박사학위논문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을 것이고, 나도 그런 차원에서 조언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깟 논문', 자격증에 불과하니 어서 쓰고 나오라고 나를 재촉했다. 지도교수를 설득하라고 했다. 대충 쓰고 졸업 이후부터 무언가 제대로 일을 하라고 했다. 자신이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그러면서 그는 또 다시 나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제안했다. 외부 강연이나 글쓰는 일 따위. 


그런 불쾌한 경험을 하고 이틀 정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저러한 제안들이 나를 정말로 생각하고 나를 위해주는 제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런 일들을 해서, 자리를 얻으면, 행복할까?" 물론 나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싶다. 그러나 누군가가 잘 봐줘서, 내 공부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직장을 가지게 되면 그게 정말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까? 지금까지는 어떤 방식이든 자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언제든 가져다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을'로, 심지어 싫은 소리도 못 하는 '을'로 만들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하다 보면 나에게는 항상 나의 연구와 공부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빨리 졸업하고 뭔가 '일'을 하고 싶었다. 박사학위가 있으면 지금처럼 '을'로 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뭐든 빨리빨리 서두르는 나에게, 사실 나를 정말 위해 주는 사람들은 "네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아닌지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네가 너무 빠르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라"라고 말해주었다. 나의 지도교수는 나의 논문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서두르지 말 것을 충고했다. 공부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사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말이 속 편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빨리 졸업하고 빨리 제대로 된 직장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강하는 학교의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박사논문을 대충 쓰고 졸업하려면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빨리 직장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건 생각해 보니, 내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생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공부에 대해 가졌던 마음을 배신하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진기주 씨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아침에 눈이 떠지는 일을 선택했다. 진기주 씨는 자신이 선택한 연기의 길을, "상처를 많이 받게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가장 잘 하고 싶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공부를 대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잘 하고 싶은 일은 그 무엇보다도 연구다. 나는 정말 좋은 연구자가 되고 싶다.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정직하게 공부한 것을 꾸준히 쌓아올려서, 10년 뒤, 20년 뒤에 되돌이켜 보았을 때 항상 꾸준하게, 열심히 연구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런 연구자가 되고 싶다. 


공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쩌면 너무 '나이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다른 일들을 기웃거리고, 그런 일들을 해내면서 스스로 뿌듯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공부를 가장 잘 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내 삶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더라도 적어도 어떤 순간에는 공부를 가장 우선순위로 놓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당연한 결심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을'이 되고 내 공부에 대해서는 '갑질'을 하는 그런 태도를 이제 그만 버리려고 한다. 나는 내 공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중요하게, 소중하게 대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 공부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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