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값을 해보는 글
나는 지금 몇 년째 지속적이고 은근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오늘 오후에는 왠지 그 공포와 불안이 더 심하게 느껴져서 노트북 앞을 그냥 떠나 세살짜리가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어딘가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고 싶은 심정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글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운전면허의 필기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잘난 척 하며) 말했는데, 사실 내가 가진 학위도 석사 학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간절하게 박사학위가 가지고 싶다. 그것도 좋은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싶다. 그래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고, 그것이 몇 년째 끝나지 않고 있다. 끝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기준에서는 아직 시작조차 안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게 내 모든 공포감과 불안감의 핵심이다. '핵심'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두려운 건 그냥 박사논문을 못 쓰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MBTI가 내향형 어쩌구 하는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한다던데, 내가 지금 그 상태이다. 오늘 아침에는 인터넷 익명 커뮤니티에서 '내 남친 석사 했는데 교수되기 힘들어?'라는 글에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교수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성토하는 댓글들을 잔뜩 봤다. 이런 걸 볼 때 나의 생각 패턴은 이렇게 흘러간다.
와.. 이공계도 진짜 교수 되기 힘들구나. -> 나는 될 수나 있을까? -> 안 그래도 코로나에 학령인구 감소 때문에 대학이 난리인데 빨리 졸업 안 하면 문 다 닫히는 거 아닌가? -> 그러면 난 뭐 먹고 사냐 -> 지금 출강하는 학교에 다시 간 빼 줄 듯 을질을 해야 하나?(지난 글의 결심이 무색하게) -> 박사논문 끝나긴 하겠지? -> 안 끝나면 어쩌지? -> 월 수입 몇십만원으로 살 수 있을까? -> 나는 그래도 상황이 좋은 편인가? -> 그 때 유학을 갔었어야 했나? -> 유학을 갔었으면 지금 좀 나았을려나? -> 유학 갔다 온 누구는 어디 교수 됐다던데... .... 등등등....
머리로는 안다. 이런 불안과 걱정은 쓰잘데기 없고, 결국 엉덩이 무겁게 앉아서 뭐라도 읽고 쓰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흔들리지 않는 태산과 같은 기상만이 빛나는 박사학위를 가져다 주리라는 것을.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너무 쫄보인데. 내가 그런 기상을 가졌더라면 애초에 회사를 안 그만두지 않았을까?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
여튼, 요는, 박사논문을 쓰는 일이 너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다. '힘들다'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난 불만스러울 정도다. 박사논문을 쓰는 일이 힘들다고 하면 보통 공무원 수험 공부 같은 것을 떠올릴 텐데, 그런 것과는 종류가 매우 다른 힘듦인 것 같다. 이건 책상에 앉아 있는 게 힘들다거나, 세상과 단절되어서 힘들다거나(이건 오히려 땡큐다), 머리에 집어넣을 게 너무 많아서 힘든 것과는 다르다. 얼마 전 가족을 만나서, 내가 논문에 대해 어떤 부담감을 지고 있는지 이야기했더니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심각하게 되물어 온 일이 있다. 내가 병적으로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논문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내가 겪는 마음의 어려움을, 한편으로는, 스스로 되게 공기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사논문 쓰고 있으니까'라는 전가의 보도로 나의 모든 힘듦을 환원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 지금의 고통은 박사논문을 쓰는 자들은 마땅히 겪을 수밖에 없는 난관이로구나, 논문 쓰는 자들이여 모두 화이팅! 이라는 식으로. 물론 이 고통은 박사학위를 받으면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겠지만...) 이 공포감과 불안함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지금 느끼는 힘듦을 구체적으로 좀 써두려고 한다.
일단 내가 지금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걱정하고 있는 것은, '논문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다'라는 것이다. 사실 진짜로, 논문을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 주제를 잡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때는 몰랐지... 이렇게 연구가 안 되어 있고 이렇게 어렵고 재미없을 줄은... 선행 텍스트들을 읽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5분마다 현타가 오는 것 같다. 되게 야심찬 주제를 잡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 세부 전공에서는 거의 다루어진 바가 없어서, 이웃 영역의 문헌들을 뒤져가며 자료를 찾아야 하고, 그나마도 쓸 만한 자료가 많지 않다. 쓰는 사람이 주제에 대한 자신이 없는데 이 논문이 끝까지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쓰는 사람이 천년만년의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도 논문이 자랄까 말까 하는데... 근데 지금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이미 써 놓은 게 100페이지 쯤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엎을까? 이게 주식에서 손절 못 하는 사람의 마음인가? 나는 절대 주식 하면 안 되겠다.
또 한 가지 꾸준히 드는 생각은, 내가 지금 써놓은 부분들이 너무 쓰레기 같다는 것이다. 써 놓고 읽어 보면 왜 이렇게 멋만 부려 놓고 실속이 없지 싶다. 근데 더 슬픈 건 그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석사논문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내가 써온 많은 학술적 글들에 대해서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 사람들이 인문대생 놀린다고 이놈 석사논문 읽어버린다~! 뭐 이런 농담 하던데, 나는 내 석사논문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읽었다고 하면 감사하다. 근데 이건...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이 박사논문은 좀... 좀 그렇다. 이걸 쓰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심사위원을 다섯 명이나 섭외해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그냥 내용 채워서 제출하면 성실성을 봐서 학위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논문 자체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논문 쓰는 생활'을 하는 자로서 느끼는 바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항상 쫓기고 있다. 그리고 논문을 쓰는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할 때, '이 시간에 논문을 썼더라면...'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코스웍 기간을 포함해서 지난 몇 년간 논문을 제대로 앉아서 쓰지 못했는데, 그 탓인지 나는 마치 어린 자식을 방치하는 워킹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논문을 생각하면 어떤,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든다. 너무 논문 논문 거리다가 과몰입한 것 같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정말 그렇다. 그래서 정말로, 논문 생각 하다가 눈물이 줄줄 난 적도 있다. '내 논문 어떡하지...'하면서. 내 주변 선배와 지인들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사논문을 쓸 때만큼은 논문에 올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조언을 많이들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죄의식처럼 돌아오는 것 같다. 물론 일이나 강의를 안 한다고 해서 24시간 논문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나는 논문을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다. 그리고 이 힘듦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힘듦이다. 내가 공부를 하고 내가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심지어 머리를 안 힘들 만큼만 조금 쓰면 되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내가 인문학 전공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머리를 엄청 써서 내놓은 것이 실제로 세상에 무언가를 더하는 아웃풋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수능 공부는 열심히 하면 점수라도 나오는데, 이건 정말로 내가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겠구나 싶긴 하다. 결국 돌고 돌아서, 그래도 해야지 뭐, 로 결론이 난다.
그래,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근데 이거 쓸 시간에 논문을 썼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