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때
7.6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의 말에 이모까지 병원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이모가 오기 전 날부터 성이도 와있었다. 올 해 24살로 같이 다니면 항상 오빠 소리를 듣는 든든한 남동생(홍성)이다. 성이는 쭉 아빠랑 살았어서 사이비교회에도, 이모한테도 딱히 트라우마가 없다. 키도 크도 덩치도 크고 얼굴도 좀 험악하게 생겨서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다들 조금 무서워하는 스타일이다.
성이한테 얼른 달려가서 이모가 하고 있는 만행을 일러바쳤다. 성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이모한테 갔다.
‘나는 당신을 이모라고 생각 해 본 적 없으니까 당신이라고 부를게요.’ 하면서 입을 뗐다. 난리가 났다. 이년 저년 섞인 욕을 하면서 성이가 없었으면 내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였다. ‘률아 이리와봐’ 하면서 나를 계속 끌고 가는데 성이가 우리 누나 이름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하면서 이모를 막았다. 이모는 소리를 지르면서 썅년아, 엄마 구원을 니네가 책임질 수 있냐고 했다. 지금 봐도 썅년과 구원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등장하는 것이 참 신기하다.
나는 사이비교회를 나온 뒤 아직도 그 안에 있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 애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을 해왔다. 주로 나처럼 부모님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방송사, 신문사와 인터뷰도 하고 사비를 털어 그 애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해외까지 나가기도 했다.
내가 먼저 활동을 시작했고 엄마도 나를 따라 반 사이비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피해자 모임에 참여하고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도 하고 내가 도와주고 있는, 사이비 가족들과 연을 끊은 친구들과 다 같이 명절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엄마 장례 때 이제 갓 20대 초, 중반인 이 친구들이 모두 와서 3일 밤낮 내 곁을 지켜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또 엄마가 도와준 사람들, 엄마와 함께 반 사이비 활동을 했던 많은 분들도 장례식 때 오셔서 누구보다 슬프게 울다 가셨다. 용맹하던 전사가 떠나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엄마와 나는 사이비에서 썩은 10여년의 시간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분노하고 또 치유하면서 전우애를 다졌다. 그런 엄마인데 죽기 직전에 성폭행범 이름(교주)을 부르라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회개는 또 무슨 얼어 죽을 회개?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있는 힘껏 이모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를 떠나보내는 하루 하루에만 오롯이 마음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성이도 그런 엄마를 알기에 사이비 교회 사람들 우리 엄마 장례식장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일 생각 말라고 일렀다. 이모가 말했다. 우리 교회 사람들 빼고 니네 둘이 장례식 하면 손님이 몇이나 올 것 같냐고. 장례식도 상주(엄마 고향)에서 하지 말고 이쪽으로는 발도 들일 생각 말라고 했다. 엄마 묘도 상주에 있는 가족묘에는 쓸 생각도 말라고 했다. 태워서 산에 뿌리든지 바다에 갖다 뿌리든지 니네가 안고 살든지 알아서 하라고. 우리 쪽(나한테는 외가) 친척들도 부를 생각 말고 둘이 알아서 잘 해보라며 병원을 떠났다. 그 날 이후로 진짜로 이모는 발길을 뚝 끊었다.
아직 끝이 아니지만 일단 7월 6일 하룻동안의 일은 이렇게 정리를 해보았는데, 쓰는데도 열이 받아서 혼났어요. 아직도 뒷목이 후끈후끈해요. 이모를 미워하면서 내 몸까지 상하면 이건 더 억울하겠다 싶었습니다.
엄마 글 중에서 분노를 에너지로 바꾸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내가 어떤 것에 실패했을 때, 미움의 대상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럴 줄 알았어.'하고 빈정댈걸 생각하면 성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다가도 체하게 만드는 미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를 살릴 에너지로 전환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글을 읽을 때 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엄마 말을 다시 되새겼습니다. (그 내용의 엄마 글이에요. https://brunch.co.kr/@red7h2k/59)
우울하고 좌절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이모가 보게 할 순 없어요. 이모때문에라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당당하고 재밌게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