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름답고 단란한 콩가루집안
7.6
엄마가 이혼 이야기를 시작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쯤 나한테 고민이 있다고 했다. ‘률아, 어디까지 까야할까?’ 사이비 이야기를 브런치에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고민이었다. 이혼 이야기도 이미 충분히 자극적인데 사이비 이야기까지 들어가면 너무 삼류 막장 스토리가 되는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됐건 누가 봐도 이상한 그 ‘사이비’교회를 다닌 자신의 과거가 창피하기도 하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써야한다고 했다. 10년을 넘는 시간을 쏙 빼고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부분을 거짓말로 얼버무리게 될 것인지에 대해 강조하면서 창피한 과거일수록 정면으로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오늘 내가 쓸 내용도 그렇다. 이렇게까지 까(?)도 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엄마에게 했던 나의 조언을 떠올려 이 이야기까지 쓰기로 마음먹었다. 얼마나 골 때리고 환장하는 콩가루 집안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불쌍하게 볼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내가 엄마 딸이긴 딸이다. 낯이 두꺼워 남사스러운 줄도 모르고, 배를 갈라 속을 훤히 뒤집어 보이듯 있는 그대로 글을 안 쓰고는 못 베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자면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단란한 콩가루 집안에서 ‘나름대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라왔고, 지금도 그렇다.^^...
엄마한테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나에게는 이모다. 이모는 사이비교회 목사로, 이혼 직후 오갈 데 없는 엄마를 전도했고 자연스럽게 나도 엄마와 이모를 따라 사이비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미취학아동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을 나는 그 곳에서 보냈다. 그 곳의 교주는 성폭행으로 10년형을 받고 징역을 살다가 몇 년 전 출소를 한 사람이다. 그 곳에서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교주만의 여자가 되어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목사’로 임명하는데, 그래서 그 곳에는 17살짜리 목사도 있다.
이모는 나를 ‘목사’로 키우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기도, 산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조건기도 등등에 시달렸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신앙이 안좋다는 이유로 고등학교로 진학을 못하게 하고 교회(이모 친구가 목회를 하는 곳)에 나를 감금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를 당하면서 ‘설교-기도’만 반복하며 살았다. 그 때 더는 그렇게 못 살겠어서 이모가 새벽기도 간 사이에 짐을 싸서 아빠한테로 도망쳤다. 엄마랑 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17살) 참아왔지만 엄마는 이모가 꽉 잡고 있었고 더는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오면서 결심했다. 엄마와도 이제는 끝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엄마도 그곳을 나오게 되었고, 우리는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듬뿍듬뿍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그보다 행복할 수 없게 지내왔다.
연명치료 포기각서를 쓰려면 직계가족들이 모두 서명을 해야한다. 임종이 가까워왔다는 의사의 말에 외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리고 월요일에 병원에 오셔야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모가 병원에 왔다.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온 것이다. 엄마와 내가 모두 사이비를 나온 뒤로는 아주 가끔 집안 행사 때 몇 번 얼굴을 봤는데, 그 때 마다 우리한테 지옥에 떨어질거라느니 더러운 모녀라느니 폭언을 해서 사이가 안좋았다. 그런 이모가 병원에서 나를 보자마자 안아주면서 같이 우는 거였다. 당시에 약 2주간 혼자서 엄마를 책임지면서 너무 힘들었어서 어른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나를 안아주니까 너무 위안이 되고 좋았다. 이모는 이모구나 싶으면서 의지도 됐다. 그런데 한 10분쯤 지났나? 나를 병원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률아, 너 회개할거니?’ 어안이 벙벙했다. 뭘 회개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도 없고 슬퍼하기에도 바빠서 일단 그냥 하겠다고 말했다. ‘..으..응. 할게.’ ‘언니도 회개 해야 돼. 너네(나랑 엄마) 둘 다 선생님(교주) 그렇게 등지고 가서 그래.’라고 하는 것이었다. 누가 뒤통수를 쎄게 한 방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말도 안나오고 그냥 어버버 하고 있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그 때 회개 한다고 말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 때부터 시작됐다. 코로나 때문에 직계가족인 부모, 자식, 배우자 외에는 중환자실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병원 측에 그런게 어딨냐며 소리를 지르고 떼를 썼다. 중환자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삼성이 이래도 되는거냐며 신고 해야된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가 진통제 때문에 의식이 없다고 하니까 주치의를 붙잡고 진통제를 다 제거해서 제정신이 돌아오게 하라며 행패를 부렸다. 진통제를 갑자기 제거하면 통증으로 쇼크가 와서 바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데 그래도 5분만 어떻게 안되냐며 의사를 잡고 늘어졌다. 죽기 전에 직접 본인 입으로 교주이름을 부르고 회개를 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리저리 다 쑤셔봐도 면회가 안된다고 하니까 나보고 률이 니가 들어가서 영상통화로 엄마가 선생님(교주) 이름을 부르고 자기(이모)가 하는 말을 따라하게 하라는거다. 영상통화가 안되면 전화를 걸테니 자기(이모)가 하는 말을 엄마 귀에 들려주란다. 눈물이 쑥 들어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릴 때부터 이모한테 혹독하게 시달렸던터라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 한마디가 제대로 안나왔다. 아니 사람이라면 이럴수가 있나?
너무 길어서 다음편에 이어서 쓸게요. 저 이 글써서 고소당할지도 몰라요.ㅎㅎ
근데 엄마 닮아서 고소도 안무섭고 간만 커가지고 이 글 링크 복사해서 이모 보내줄까 합니다.
요새도 이모 꿈을 가끔 꾸는데 꿈에서도 계속 시달려서 직면이라는 방법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해보려구요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아, 이모 혹시 이 글 보고있어? 나 회개 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