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는 길 마음 편할 수 있게 내가 인사 해줄게
7.6
중환자실에 지정 면회시간 외에 아무 때나 들어가도 되는 특혜를 받았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는 자율면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어도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잘 분간이 안갔다. 다행히 그 때 부터는 항상 성이와 함께였다. 우리는 말이 없이 앉아있다가도 배가 고프면 같이 밥을 먹었고 잠이 오면 번갈아 잠을 잤다.
중환자실에 처음 들어올 때는 연결된 링겔도 한두개가 다였고 정신도 제일 멀쩡해서 도무지 중증환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엄마의 팔, 다리, 발목, 입까지 연결된 기계가 주렁주렁이었다. 하루에도 여섯, 일곱 번씩 피검사를 하느라 양 팔이 시커멓게 멍들어있었고 복수가 차서 하체에 혈액순환이 안되어 다리가 퉁퉁 부어있었다. 손에는 온기가 없었고 발끝도 조금씩 까맣게 되기 시작했다. 기도에 연결한 관에서는 담즙이 올라와 계속해서 입가를 닦아줘야 했다. 이런 엄마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자니 산에도 가고 수영도 하고 나를 한 대 쥐어박기도 했던 엄마가 진짜 우리 엄마가 맞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2주 전에 같이 칼국수를 먹고 시장에 가서 내 여름잠옷을 샀었는데,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사람이 그 때와 같은 사람이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빵빵하게 부푼 엄마의 배를 만지며 ‘암’이라는게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걸까 무섭고 두려웠다.
의사는 매일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했다. 맥박이 50이라 당장 2시간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해서 2시간동안 실컷 울었는데, 2시간 뒤에도 엄마는 살아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드니 밤에는 중환자실 앞을 떠나지 말라고 해서 밤새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쭈그리고 엄마 옆을 지켰는데 아침에도 엄마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낮 시간 내내 화장실을 전전하며 대충 눈꼽만 떼고 양치질만 하며 중환자실 앞을 지키다 보면 하루가 갔다. 엄마는 계속해서 잘 살아있었다. 그렇게 ‘오늘’이 쌓여 며칠을 보내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 잘 가라고 했다가 또 가지 말라고 했다가, 어느 순간은 평온하게 엄마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또 돌아서서는 제발 안가면 안되냐고 붙잡고 울었다가를 반복. 말 그대로 엄마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7.7
이틀 뒤 자정, 의사가 나를 따로 불러 엄마가 지금까지 맞던 진통제가 잘 들지 않는데, 프로포폴로 약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지금 맥박도, 심박수도 너무 불안정해서 프로포폴을 투여하는 동시에 심정지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프로포폴을 투약하겠으니, 동시에 임종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랑 성이, 브래들리는 눈가가 촉촉해져서 엄마 침대 앞을 빙 둘러 서있었는데 투약한지 30분이 지나도 엄마가 여전히 살아있었다. 며칠 밤을 병원에서 샌 자정, 임종을 기다리는 우리 셋은 모두 눈꺼풀이 무거웠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임종을 기다리는 그 모습이 슬프면서 어딘가 우습기도 했다. 엄마가 이까짓 프로포폴에 심정지가 올 것 같지 않기도 했다.
그 날도 엄마는 ‘오늘’을 넘겼고, 나는 어김없이 병원 의자에서 잠을 잤다. 호흡기를 끼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는 엄마를 보며 아프면 이제 가도 된다고 속으로 말했다. 그러다가도 말 하지 못하고 눈 뜨지 못해도 그냥 내 옆에서 숨만이라도 쉬고 있다면 좋겠다는 욕심 섞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사는 자꾸 두 시간도 못 버틴다는데 며칠씩 버티고 있는 엄마를 보며 이러다가 갑자기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분명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같은데, 인사가 쉽지 않았다. 나 때문에 못 갈까봐 가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다.
엄마 잘 가. 아니 가지마. 아니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