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여인> / 카임 수틴
아무 정보도 없이 보게 된 작품 하나가 가슴에 파르르 진동을 줄 때가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 어느 시대인지, 어떤 배경으로, 무슨 화법으로 작품을 그렸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작품을 보는 순간 어떤 파동을 느끼는 것이다. 내게는 카임 수틴의 작품이 바로 그랬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이그러져 있는 것일까. 아니, 구겨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깨는 움츠러들어있고 눈을 크게 떠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그의 눈빛은 선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 겁에 질려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불안한 모습으로 쪼그라들어버린 걸까. 작품의 제목은 <미친 여인>이다.
카임 수틴을 처음 알게 된 건 서경식 교수님의 <나의 서양 미술 순례>라는 책에서였다. 교수님은 유럽 여행 중 우연히 들린 한 작은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쳤다고 한다. 나 또한 책에 등장하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유난히 그의 작품에 호기심이 들었다. 더 알아봐야지... 생각을 했다가 잊고 지내던 중에, 우연히 일본의 한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유대계 리투아니아인 작가인 카임 수틴이다. 태생부터 이렇게 이지러진 작품을 그릴 복잡한 운명이었던 것일까. 그는 러시아 제국 산하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한 소도시 스밀로비치에서, 보수적인 유대교를 믿는 가난한 가정의 열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고향이라 부를 터전이 없어지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이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숙명.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그림과 회화를 터부시 하는 가장 보수적인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수틴이 가진 예술적 재능은 그 자체로 항상 공격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저주받은 능력이었다.
가난한 재봉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런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샤임에겐 폭력적인 체벌 또한 일상이었다. 그가 가진 그림에 대한 열망은 억눌러야만 했던, 불타는 듯한 불안이자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어 가족을 떠나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파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루브르를 제 집처럼 넘나들며 모든 대가들의 작품을 굶주린 야수처럼 빨아들였다. 대가들의 회화적 장점들을 자신만의 화풍에 녹여낸 그의 재능을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그의 작품처럼 일렁거렸다. 그는 새 삶의 터전인 파리에서도 죽을 때까지 모딜리아니나 샤갈 같은 외국인 예술가들과만 교류했다. 언제나 철저한 이방인의 삶, 그렇기에 존재 자체가 불안인 삶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그러지고 꿈틀거리고 요동치고 있다. 항상 억눌러야만 했던 마음속 고통과 불안이 그의 렌즈를 거친 모든 것에 투영되어 있다. 사람도, 정물도, 집도, 풍경도, 끝도 없이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춤을 한바탕 추고 있는 것만 같다.
스스로 벗을 수 없는 빨간 구두를 신고 멈출 수 없는 춤을 추는 소녀처럼, 그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에선 모두 어쩐지 슬픈 광기가 느껴진다. 그런 그가 그린 한 광인. 나는 왜 이렇게 이 작품에 눈길이 가는 걸까.
간혹 길을 걷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들을 본다. 그저 행색이 남루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광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세계를 보는 것만 같은 눈빛, 혹은 혼잣말.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는 그가 무언가 다르다는 어떤 신호를 비교적 정확히 감지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공고히 갇혀있을 뿐. 저 사람도, 누군가와 소소한 농담을 하고 돈을 벌고 밥을 해 먹고 빨래를 개던 평범한 삶이 반드시 있었을 텐데. 어떤 삶의 폭풍우가 저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 버린 걸까. 조용히 혼자 미쳐버린 사람들. 나는 어쩐지 그들의 모습에 나의 일면을 비춰본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시절이 있었다. 아니, 차라리 정말로 미쳐서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억누르기 힘든 화와 억울함이 불처럼 들끓었을 때, 내 안에도 어떤 끔찍한 파괴적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의 폭력성.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그건 나에게 있는 것이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그런 순간들에 그 분노를 타인에게 그대로 칼날로 겨누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온전한 제정신으로도 태연자약하게, 타인에게 끔찍한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일 뉴스에서 다뤄진다. 이보다 더 참담한 일이 다시 있을까, 하면 그 생각이 무색하게 더 슬프고 무섭고 처참한 일들이 끝없이 이어져 일어난다.
하지만 적어도 저 작품 속의 여인은, 구슬프게 눈치를 보고 있을지언정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가느다란 정신 한 가닥. 고통과 분노가 내면을 할퀴어서 뒤틀리고 찢어질 것 같아도 남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아주 작은 자존심.
고통의 끝에 타인을 망가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길을 택한 것 같은 샤임 수틴의 작품 속 여인.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카임 수틴은 과연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카임 수틴 또한 잠재우기 어려운 불안과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대신에 그 모든 그 활화산 같은 감정들을 모두 캔버스에 쏟아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의 사정을 알아서일까. 그의 휘몰아치는 듯한 거친 화풍과 쥐어뜯는 듯한 붓질이 꼭 캔버스에 행한 자해 자국처럼 느껴진다.
미쳐버릴 것 같았던 그가 이러한 작품들을 토해냄으로써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과한 추측일까. 어쩌면 수틴도 나도, 작품 속 그녀처럼 유순한 광일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