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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Jun 24. 2024

여자가 된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릴리 엘베의 초상> 게르다 베게너

  - 정체성 :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지금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과 사랑에 빠지고 어떤 것에 절대 타협할 수 없는지. 나이가 40이 넘고 아이를 낳고도 아직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한다는게 가끔은 조금 부끄럽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나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40년 가까운 인생 안에서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나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그 중에서도 이것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떤 부분도 완전히 반대로 바뀌는 변화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불변하지 않는 나의 본질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걸까?


좋아하는 배우 중에 한 분인 유태오 배우님. 그 분보다 사실 배우자인 니키 리 작가님을 먼저 알고 있었다. 정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사진 작업을 해오신 분이다. 여러 삶과 맥락속에서 '과연 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오셨다. 


정체성에 대한 작업을 하는 작가의 배우자로서, 그리고 작품마다 새로운 자아로 정체성을 갈아입는 한 배우로서, 과연 그가 가진 '정체성'은 무엇일까. 


유태오님의 인터뷰 중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했다. 독일과 뉴욕, 한국으로 여러 곳을 옮겨 살면서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은 없었냐고. 유태오 배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정체성은 흔들린 적이 없다. 내 정체성은 내 아내에게 있다."

불변하면서도 동시에 변화무쌍한, 정말 멋진 정체성의 정의였다.


<릴리 엘베의 초상> 게르다 베게너


최근에 <마음 챙김 미술관>책을 읽다가 화가 릴리 엘베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몇 년전 개봉한 영화 '데니쉬 걸'이 바로 그녀의 자전적 내용인 것도.  


 세계 최초의 트랜스 젠더 여성이었던 릴리 엘베. 그녀는 원래 남성으로 태어났고 게르다 베게너라는 화가와 결혼해 화가 커플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내인 게르다의 모델이 펑크를 내었을때 게르다의 요청으로 대신 여장을 하고 모델을 하다 자신 안에 억눌렸던 여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릴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아내인 게르다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당황했지만 릴리의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지지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릴리를 자신의 뮤즈로 삼아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


게르다의 작품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품은 릴리의 모습은 대중과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고 게르다는 이후 화가로서 성공의 궤도를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둘은 서로의 뮤즈로, 연인으로, 가장 친한 친구로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릴리의 정체성은 변화했던 것일까, 혹은 원래 있었던 그 본질이 나온 것일까?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가장 가깝게 서로의 세계를 탐구하고 응원하던 아내 게르다와의 관계만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남성에서 여성이 된다는 핵폭발과 같은 충격적 정체성의 변화를 겪었지만, 서로의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한다는 게르다와의 관계에서 만큼은 그 어떤 정체성의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릴리는 용감하게 최초로 외과수술적인 방법을 통해 여성으로 재탄생했고, 수술거부반응으로 이후 1년밖에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컨데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온전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과연 나다운 채로, 나의 본질의 가깝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릴리 엘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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