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기 전, 남들에게는 조금 우스울지 모르지만 내겐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말도 못하는 신생아가 아픈데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그래서 아픈지도 모르고 방치하다가 아이를 위험하게 하는 것.
아이는 아프면 열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쪽으로 유독 둔감한데다가 모성애가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던 나는, 내가 그 미묘한 인간의 체온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지 몹시 걱정되었다.
물론 그 걱정은 아주 바보같은 걱정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을 생존시키는데에는 정말 끝내주는 달인들이다. 아픈 아이(특히 신생아)들은 깃털만큼의 아주 조그마한 불편함이 있어도 허리가 뒤로 활처럼 꺾여지도록 자지러지게 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해결될 떄까지 몇시간을 울 수도 있다. 정말, 아픈 아이를 알아채리지 못할 수는없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은 뒤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면, 심지어 울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하더라도 엄마는 아이가 아픈 것을 모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하루에도 수백번씩 아이를 안았다. 기저귀를 갈떄, 재울때, 씻길때, 놀아줄때, 밥 먹일때. 아기와 나는 탯줄은 떨어졌을지언정 사실상 한몸처럼 지냈다.
그래서 나는 인간 체온계가 될 수 있었다. 아이의 몸이 조금 따끈하다 싶어 체온계로 재보면 어김없이 미열이 나고 있었다. 아이의 컨디션이 나빠지기 전부터 먼저 아이가 아픈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수백만번의 포옹은 이렇게 강력한 데이터를 제공해주었다. 매일 살을 맞대고 치대면서 그렇게 아이와 나와의 육체적(?)관계는 끈끈히 쌓여갔고, 막연하게나마 이 겹겹의 시간이 쌓인 어떤 것이 내 모성애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아기의 첫 손길> 1890, 메리 카사트
그래서 아이를 낳은 뒤에 카사트의 작품이 더 와닿았을 것이다. 메리 카사트의 작품 속에서 엄마와 아이들은 항상 살을 맞대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씻기거나 볼을 맞대거나, 깊이 끌어앉고 있는 장면이 많아서, 작품을 보고 있자면 우리 아이가 고만한 아기일때 나던 꼬습고 달큰하던 살냄새가 화면 전체에서 폴폴 풍겨나오는 것만 같다. 미혼이었던 메리 카사트가 이 행복의 감각을 이렇게 잘 표현했다는 것에 매번 작품을 볼때마다 놀라게 된다.
냄새는 시각보다 더 강렬하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그리움을 자극한다. 작품을 보며 그 냄새가 소환되면, 나는 어김없이 우리 아가의 숱이 적어 반짝이던 머리와 터질듯한 볼살, 침으로 범벅이 되던 귀여운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작고 따뜻하고 소중한 존재를 안을때 내 심장 저 아래서부터 터질듯이 차오르던 행복감까지도.
그리고 완전히 반대의 의미에서 가슴을 저미듯이 파고들어왔던 작품은 바로 피에타이다. 나는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던 20대 중반에 피에타를 마주했다. 가이드님의 설명이 없더라도, 막눈으로 봐도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바로 십대와 같이 젊고 또 평온한 마리아의 얼굴이었다. 아들보다도 젊어보이는 마리아의 얼굴.
<피에타> 1498-1499,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속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조각하며 '마음의 이미지'를 묘사하려 했다고 한다. 즉, 원죄없이 순결하며 고귀한 본성을 가진 마리아의 마음을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얼굴에 입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작품에서 다른 것을 본다. 끔찍한 고문 속에 죽어간 아들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몸을 안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얼음같이 차가운 몸. 두 번 다시 체온과 냄새를 느끼며 안을 수 없는, 이제는 곧 썩어서 문드려져 없어져버릴, 한없이 보드랍고 따뜻했던 내 아가의 몸.
하지만 이제는 차갑게 축 늘어져버린, 수만번을 안고 부볐던, 소중한 내 자식의 몸.
천재였던 미켈란젤로가 만약 그 심상을 그대로 담아 피에타의 성모 얼굴을 빚었다면 과연 그 모습은 어땠을까. 아마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닌 우그러진 짐승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차마 두눈 뜨고 볼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을 거다. 그래서 차라리, 그런 예정된 고난조차 받아들인 성모의 마음을 새겨넣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존재가 됨으로써 받게 되는 가장 큰 기쁨과 상상하기 어려운 큰 고통. 그 길을 먼저 걸어갔을 수많은 엄마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느낌의 이 두 작품은 이렇게 내게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엮어져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엄마>라는 주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불멸의 주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