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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다양한 민주주의 모델

다시 하버마스

by Sui generis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omcracy) 체제 속에서 운영됩니다.

즉, 우리는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에게 결정 권한을 위임하며, 이 체제를 유지, 발전시켜 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정치 체계 속에 살고 있다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하나의 고정된 모델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해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 말이지요.



사실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가 여부는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주의' (-lism)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정치 체계를 지나치게 이념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민주정'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발행될 글에서 친숙함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정치 철학적으로,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공화적 민주주의(Republican Democracy)' 진영 간 이론가들의 활발한 논의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민주주의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로 대표되는 엘리트 민주주의(Elite Democracy), 캐럴 패트먼(Carole Pateman)이나 벤야민 바버(Benjamin Barber)가 주장하는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그리고 샹탈 무페(Chantal Mouffe)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가 문을 연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등으로 까지 논의가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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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확장 속에서,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존 롤스(John Rawls), 그리고 조슈아 코헨(Joshua Cohen) 등이 주장해 온 심의 민주주의의 핵심적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다수결 원칙이 아닌, 공론장 속 시민들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Deliberative Democracy에 관해 한국 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토의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숙의 민주주의'라고도 표현합니다. 개인적 선호도에 따라 저는 '심의 민주주의'라고 표현하겠습니다. Deliber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토론을 너머, 합리적 논증, 상호 간 이해, 그리고 의견 형성 과정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뜻 보기에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심의 민주주의는 어떤 이유로 조명받아왔고, 민주주의 이론 발전사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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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저는 심의 민주주의의 대표 주자인 하버마스를 통해 이 모델에 관한 해설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민주주의 담론 이론(discourse theory of democracy)”으로도 알려진 그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적법한 합의 도출을 필요로 하는 민주적 의사 형성을 위한 이상적인 (민주적) 절차들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목표는 민주적 정당성이, 다수의 지배가 아닌, 시민 간의 의사소통과 합의를 통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공론장 기반의 민주주의 실현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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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종종 “심의적 전환(deliberative turn)”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을 형식화하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시도에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 그의 다양한 작업을 경유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어림잡아 보아도, 예를 들어, 도구적 합리성을 향한 그의 전임자들의 반감과 달리, 하버마스는 우리의 합리적 자율성을 위한 희망을 유기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그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희망적 모델을 17세기 후반 부르주아 공론장 등장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을 완성하기 전에도,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의 로크적 혹은 자유주의적, 그리고 루소적 혹은 공화주의적 모델로 분기되는 기존의 민주주의 이론을 향한 대안으로써 예비적 스케치를 제공했다는 점 등등 (이러한 기획은 공론장을 포함한 시민 사회 구조를 언어 화용론을 통해 상호주관적 구조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하버마스의 헌신의 연장선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하버마스는,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 사이의 자신의 범주적 구분을 차용함으로써, 공론장의 구조 변경에 관한 좀 더 상세한 해설을 제공하고, 담론 윤리, 법,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을 완성해 온 것이지요.

이 이론을 통해, 그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침식된, 그리고 탈중심화된 사회로 분화된 “정치적 공론장 내 의견, 의사 형성의 논증적 특징”을 소생시키고자 합니다.


하버마스의 전체적인 학문적 여정에 관한 요약을 제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한 철학자의 일생의 과업을 이 협소한 공간에서 모두 풀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다소 간 오만하고 나태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계를 고려하여, 저는 그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Between Facts and Norms)'을 중심으로 하버마스가 제시한 심의 민주주의에 관한 간략한 개괄 제공을 목표로 합니다.

그 간소함에도 불구하고, 이 개괄 (혹은 해설서)은 하버마스 민주주의이론 내 주요한 세 가지 키워드를 포괄할 것입니다:

(i) 의사소통 행위와 법에 의한 사회 통합, 민주적 공론장과 시민 사회,

(ii) 담론 윤리 속 보편화 원칙, 그리고

(iii) 사회 통합 매개체로써의 법.


이 키워드들을 우리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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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Between Facts and Norms은 1996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된 책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의구심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Epilogue까지의 연재가 그러한 의구심을 다소나마 희석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심의 민주주의를 통해 하버마스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심의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새로운 대안, 혹은 적어도, 특정한 함의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 다음 회차에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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