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어떻게 도덕을 필요로 하면서도 도덕과 구별되는가
이 연재글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영어명-Between Facts and Norms/독일어명-Faktizität und Geltung)을 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작업으로써, 하버마스 저작에 관한 이 해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반추하는데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Prologue부터 순차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인권(사적 자율성)과 국민주권(공적 자율성)의 상호 근원성을 하나의 권리 체계로 통합하고, 이를 법의 정당성 속에 정초 하려는 하버마스의 시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법의 저자이자 수신인으로서 시민이 참여하는 의견 및 의지 형성의 담론적 절차를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권리 체계의 담론-이론적 독해'를 제안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법의 정당성을 강제력이 아닌 시민의 합리적 수용 가능성에 두는 하버마스의 핵심 기획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특히 칸트적) 도덕성을 독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주관적 정당화 속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61).
이 재구성을 위해,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법과 도덕성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둘 간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서술합니다. 이 서술은 큰 맥락에서,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I. 제도화된 법, 하지만 제도화되지 않은 도덕
하버마스는 (탈전통적) 도덕성이 일종의 '문화적 지식(cultural knowledge)'의 유형을 상징한다고 여깁니다.
도덕성은, 문화적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고, 구성될 수 있으며, 전송될 수 있고, 비판적 반성에 대상이 될 수 있는 지식 체계나 문화적 상징의 의미론적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도덕성이 정당화된 도덕적 기대의 실현을 보장하는 제도적 매개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본질적으로 도덕은 제도화된 법적 체계와 복잡하게 얽힌 사회화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도덕성에 상응하는 초자아의 발전 (혹은 양심의 행위자)을 수반하는 것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13-114를 참조해 주세요)
반면, 하버마스는 법이, 문화적 지식뿐만 아니라, “제도적 수준에서 구속력"을(a binding character at the institutional level, Ibid., 107)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에 따르면, 법은 (i) 규범적 명제와 해석들로 구성된 지식 체계로써, 그리고 (ii) 규범적으로 규제된 행위 복합체로써 이중적 본성으로 특징화 됩니다.
법적 틀 속에 동기와 가치 정향의 얽힌 상호작용 덕분에, 법적 규범들은 행위를 위한 직접적인 효과를 갖는 것이지요.
이는 도덕적 판단 그 자체에서는 결여된 특징입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문화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구조화된 법이 단순히 지식으로 존재하는 도덕의 한계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도덕적 행위자와 법적 주체 사이를 구분합니다.
그가 보기에,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는 독자적으로 도덕적 지식을 획득하고 배양하며 실천으로 옮겨야 할 때는 유래없는 (i) 인지적, (ii) 동기적, (iii) 조직적 요구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담은 '법적 주체'로서 우리에게는 상당히 감소되게 되는데요.
하버마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i) 인지적 요구와 관련하여, 도덕은 공평무사한 판단, 그리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일반화된 도덕적 규범들을 논쟁적 불일치의 상황에 적용하고자 할 때, 도덕성의 추상적 본성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가정합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 “인지적 비규정성(cognitive indeterminacy)”이 입법절차, 사법적 의사 결정, 그리고 법 도그마틱의 연구를 포함한 "법 기원의 사실성"(the facticity of the genesis of law, Ibid., 115)을 통해 흡수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둘째, (ii) 동기적 요구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도덕이 우리 스스로를 도덕적 규칙의 수신인이자 저자로서 합치시킬 것을 강요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그는 “인식된 원리에 따라 인도된 행위에 관한 동기적 불확실성(motivational uncertainty about action guided by known principles, Ibid., 115-16)”이 도덕적 틀 속에서 부적절하게 다루어진 채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는 “법집행의 사실성(the facticity of the law’s enforcement, Ibid., 116)”이 “동기와 태도를 개방된 채 남겨두면서 규범을 준수하는 행위(norm-conformative behaviour while leaving motives and attitudes open, Ibid)”를 강제함으로써 규범적 기대에 제재의 위협을 부과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iii) 조직적 요구와 관련하여, 그는 점차 증가하는 사회의 복합성이 도덕적 요구와 의무의 보편주의적 특성이 익명의 네트워크와 조직에 의존적이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보기에, 법 체계는 “행위를 조정하는 일차적 규칙의 산출 역할을 하는 이차적 규칙을 (책임의 체계) [secondary rules (a system of accountabilities) that serve the production of primary rules for guiding behaviour], Ibid., 117)” 포괄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버마스에게, 도덕성은, 행위자들에게 법에 대한 일반적 복종을 제외한 여느 도덕적 부담을 덜어주는 “체계적으로 자립화된 매체에 의해 (화폐나 권력 같은) 조율되는 상호작용의 영역들 (systemically independent spheres of media-steered interactions, Ibid., 118)”을 포함한, 자신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법체계를 통해 모든 행위 영역 너머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II. 법 규정과 도덕적 규정의 영역
하버마스에 따르면, 법 규정과 도덕적 규정은 각기 다른 준거집단에 적용되고, 다른 문제들을 규제합니다.
사회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에서 경계가 없는 도덕적 세계는 “전제된 세계 시민의 공화국(a presupposed republic of world citizens, Ibid., 108)"을 포함한 “삶의-역사적인 복합성 속에서 모든 자연적 인격체(all natural persons in their life-historical complexity, Ibid., 452)”를 포괄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도덕적 세계는 완전히 개인화된 인격체의 도덕적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시공간적으로 지역화된 법적 공동체(a spatiotemporally localised legal community protects the integrity of its members, Ibid., 452)”는 오직 구성원들이 법 규범으로 만들어진 추상적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동료로서, 즉 개인적 권리의 전달자로써 인정할 때 만이 그 구성원의 존엄성을 보호합니다.
이는 모든 이들의 동등한 이익에 뿌리를 둔 도덕적 규칙이 그 순수한 형태 속에서 일반적 의지를 구체화하지만, 법은 또한 특정한 법적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특수한 의지를 표명한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하버마스는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더욱이, 도덕적 자유의지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말하기 때문에 일정정도 가상적인데 반해, 법적 공동체의 정치적 의지는 물론 도덕적 통찰과 일치해야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생활형식, 주어진 이해관계, 실용적으로 선택한 목적도 표현한다. 법이라는 매체 속에서는 행위방식에 대한 규범적 규제가 집합적 목표설정에도 개방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치적 쟁점의 본성에서 비롯한다. 이로써 정치적 의지형성성에서 고려되어야 할 근거들의 스펙트럼도 확대된다. 즉 도덕적 근거 외에 윤리적 근거와 실용적 근거도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게중심은 의견형성에서 의지형성으로 넘어간다."
> Moreover, whereas the morally autonomous will remains in some sense virtual because it states only what could be rationally accepted by each, a legal community’s political will, which of course should accord with moral insights, also expresses an intersubjectively shared form of life, existing interest positions, and pragmatically chosen ends. Political issues are such that in the medium of law, the normative regulation of behaviour is also open for the evaluation and pursuit of collective goals. This expends the spectrum of reasons relevant for political will-formation: in addition to moral reasons, we find ethical and pragmatic ones. The focus thereby shifts from opinion- to will-formation (Ibid., 152).
III. 도덕성과 법의 외관
하버마스는 도덕성과 법이 그 외연에서도 다르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법적 규제를 요구하는, 그리고 이에 종속될 수 있는 문제들이 그 범주에서 도덕적으로 관련된 문제보다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다고 언급하는데요.
전자는 법적 규제가 단지 외적인, 시행 가능한 행위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후자보다 좀 더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버마스는 법적 문제가 도덕적 문제보다 포괄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치적 규칙을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법은 구속력 있는 형식과 함께 집합적 목표나 기획을 제공(law, as a means for organising political rule, provides collective goals or programmes with a binding form, Ibid., 452)”하고, 따라서 상호 간 갈등의 해결 너머로 확장되기 때문이지요.
그는 정책과 법적 프로그램의 도덕적 중요성이 특정한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법적 규제를 요구하는 문제들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공정한 이익의 균형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된 쟁점들과 함께, 도덕적 문제뿐만 아니라, 실천적, 경험적, 그리고 윤리적 측면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민주적 입법의 의지형성과 의견형성은 도덕적 담론뿐만 아니라, 담론과 협상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의존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Between Facts and Norms의 Postscript에서 하버마스는 당면한 정치적 문제들의 복합성을 고려하여, Chapter 4의 Figure 2에서 묘사했던 합리적인 정치적 의지형성의 절차적 모델을 구성하는 담론의 네트워크를 분석적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특정한 문제들을 직선적 방식으로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담론의 종류들을 예증하려고 했던 자신의 이전 시도에 대한 반성적 분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기 세 가지 차원들을 따라, 하버마스는 이들의 공유된 토대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법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 둘 간의 상호보완 관계가 갖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i) 법은 도덕에 종속되지 않는다;
(ii) 법과 도덕 사이에 (혹은 정치적 자율성과 도덕적 자율성 사이에) 단순한 모사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iii) 법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적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iv) 행위를 이끄는 규범은 도덕적 규칙과 법적 규칙으로 이원화되었고, 따라서, 규범적 관점에서, “도덕적 자율성과 시민적 자율성은 똑같이 근원적(moral and civic autonomy are co-original, Ibid., 107)”이다.
이처럼, 하버마스에게, '상징 체계' 혹은 '지식 체계'일 뿐만 아니라 '행위 체계'로써 역할을 하는 법은 구체적 내용과 목적론적 관점을 포괄하는 고유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하버마스는 도덕성과 구별되는 법의 독자적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법적 (혹은 정치적) 담론을 이끄는 민주주의 원리를 소개합니다. 그는 행위 규범에 관한 공평무사함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해명되는 그의 초기 담론 원리 (D)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원리에 관한 논의를 착수하는데요. 이 민주주의 원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 다음 회차에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