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도덕 원리가 민주주의 원리인가?
이 연재글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영어명-Between Facts and Norms/독일어명-Faktizität und Geltung)을 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작업으로써, 하버마스 저작에 관한 이 해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반추하는데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Prologue부터 순차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법과 도덕성 간의 차이를 밝히고, 이 둘 간의 상호 보완적 관계가 갖는 함의를 분명히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에게, 법은 도덕에 종속되지 않고, 둘 간의 단순한 모사 관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법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적 문제로 한정되지 않으며, 행위를 이끄는 규범이 도덕적 규칙과 법적 규칙으로 이원화되어있는 한, 도덕적 자율성과 시민적 자율성은 똑같이 상호 근원적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62).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과 함께 (Chapters 1-5), 우리는 하버마스의 민주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 원리를 어떤 과정을 통해 형식화하고 있을까요?
I. 담론 원리 (Discourse Principle)
이전 장 말미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덕과 구별되는 법의 독자적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법적 (혹은 정치적) 담론을 이끄는 민주주의 원리를 제안합니다.
그는 행위 규범에 관한 공평무사함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해명되는 그의 초기 담론 원리 (D)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원리에 관한 논의에 착수하는 것이지요.
하버마스가 제시했던 담론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D): 가능한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동의할 수 있는 행위 규범만 타당하다.
> (D): Just those action norms are valid to which all possibly affected persons could agree as participants in rational discourses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07)."
하버마스는 이 원리가 단지 행위 규범을 공평무사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관점을 해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한 이 원리가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삶의 형식 일반에 내재되어 있는 대칭적 인정 관계를 반영한다고 가정합니다.
하버마스에게, 이 원리는 행위규범의 공평무사한 평가를 위해 충분한 규범적 내용을 갖습니다.
그는 행위 규범을 시간적, 사회적, 실재적 차원에서 일반화된 행위 기대로 이해할 때,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 이들의 이익은 예측 가능한 일반적 실천의 결과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 발화수반적 의무와 함께 합리적 담론을 통해 문제시되는 타당성 주장을 향해 상호 이해를 성취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재차,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 대한 이해는 중요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이 연재글 초반부를 정독하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그의 저서 의사소통 행위이론[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I and II]을 탐독하는 일은 공들인 시간 이상의 값어치를 전달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후 이 원리 속에서 두 개의 핵심 개념이 구체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초기 담론 원리가 (i) 다양한 행위 규범들 사이의 구별 문제; 그리고 (ii) 서로 다른 담론 형식들 (도덕적, 윤리적 법적 담론 등)을 구별하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을 수용한 것이지요.
이는 부분적으로 여러 이론가들의 문제 제기를 참고하면서도, 주로 자신의 체계 속 반성적 비판과 논리적 진전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이 개념들을 보다 구체화 함으로써, 도덕 원리와 민주주의 원리를 각각 도출합니다.
즉, 그는 상이한 행위 규범들과 이에 상응하는 규범적 진술들을 보다 구체화 함으로써, 도덕 원리를 형식화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상이한 합리적 담론을 담론적으로 정당화된 협상 절차와 매개함으로써 민주주의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식으로, 하버마스는 담론 원리를 도덕과 법 사이의 구분에 관해 중립을 유지하는 추상적인 수준에 위치시키게 됩니다.
II. 도덕 원리로써 보편화 원리 (Universalisation Principle)
하버마스는 담론 원리를,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동등하게 고려될 때만이 정당화될 수 있는 다양한 행위 규범들을 위한 도덕 원리로써, 보편화 원리로 정제합니다.
그의 형식 속에서,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 (혹은 담론-이론적으로 해석가능한) 이 원리는 관련된 모든 개개인이 집합적으로 수행하는 공적 실천과 관련된 도덕적 규범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U): 규범이 타당하기 위해, 규범의 일반적 준수가 각 개인의 특정한 이익의 충족과 관련되어 예측될 수 있는 결과와 부작용을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이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U): For a norm to be valid, the consequences and side effects that its general observance can be expected to have for the satisfaction of the particular interests of each person affected must be such that all affected can accept them freely (Ibid., 566).
이 원리는 담론 원리가 제시하는 형식적 기준을, 실질적 고려 사항, 즉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그에 대한 자유로운 수용 가능성을 통해 구체화한 도덕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도덕 원리를 통해, 어떤 규범이 도덕적으로 타당하려면 단지 논리적 동의 가능성을 넘어서, 규범의 실질적 영향이 모든 당사자에게 공정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III. 민주주의 원리 (Democratic Principle)
다음 단계로, 하버마스는 법적 형식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합리적 담론이 “법적 규범의 형식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display the formal properties of legal norms, Ibid., 460)”을 보장하기 위해, 담론 원리를 민주주의 원리로 (DP) 구체화합니다.
이 원리를 통해, 하버마스는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서로를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법 공동체들의 자기 결정 실천에 있어 수행적 의미(the “performative meaning of the practice of self-determination on the part of legal consociates, Ibid., 110)”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그는, 도덕 원리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원리의 목표를 정당한 입법 절차를 확립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DP): 법적으로 구성된 담론적 입법과정 속에서 모든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법규들 만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 (DP): Only those statutes may claim legitimacy that can meet with the assent (Zustimmung) of all citizens in a discursive process of legislation that in turn has been legally constituted (Ibid., 110)
(하버마스는 자신의 민주주의 원리를 담론 원리(D)나 보편화 원리(U)처럼 구체적으로 형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편의상 저는 이 원리를 앞으로 [DP]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도덕 원리가 규범의 정당화를 개인 간의 상호 인정에 기반한 윤리적 기준으로 제시했다면, 이 민주주의 원리는 법적 질서 내에서의 정당성이 오직 공적 담론을 통한 집단적 동의 절차를 통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IV. 다른 차원에 위치한 담론 원리, 도덕 원리,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
이 세 가지 원리들을 각기 다른 차원에 놓음으로써, 하버마스는 이들의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담론 원리(D)는 자신이 다루는 행위 규범을 구체화하지 않고 어떤 담론이 이 규범들을 위한 적절한 토대를 제공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반면 도덕 원리로써 보편화 원리(U)는 논증을 통해 도덕적 문제들에 관해 합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한 규칙으로써 역할을 합니다. 도덕 원리가 규범의 유형들을 구체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원리는 그 정당화를 위해 오직 도덕적 근거만이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규범들이나 담론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민주주의 원리 (DP)는 협상을 포함한 논증의 형식을 구체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타당한 도덕적 판단을 위한, 특히 법에게 그 정당성을 제공하는 실천적 판단과 담론의 모든 형태를 위한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형식 속에서, 민주주의 원리는 법적으로 보장된 의사소통 형식들 속에서 발생하는 의견형성과 의지형성의 담론적 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의 외적 (혹은 실천적) 제도화와 관련된 차원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는 민주주의 원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상호작용의 준 자연적 규범(quasi-natural norms of interaction we find in everyday life, Ibid., 111)”이 아닌, 법적 규범들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즉, 법적 규범들은 도덕적 관점과는 다른 정당화 구조를 가지고, 그 타당성은 제도화된 절차적 동의 속에서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 인위적 본성 때문에, 법적 규범들은 “스스로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성적인,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행위 규범의 층(an intentionally produced layer of action norms that are reflexive in the sense of being applicable to themselves, Ibid.)"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원리와 법적 규범들 간의 이 관계를 고려하여,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원리가 “정당한 입법 절차(procedure of legitimate law-making)”를 확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법 매체 자체의 생산도 조절(steer the production of the legal medium itself, Ibid.)”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버마스는 도덕 원리로써 보편화 원리를 단지 판단을 형성하는 논증의 규칙으로 여기고, 민주주의 원리는 동시에 지식과 시민들의 제도적 실천을 구조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 원리들과 함께, 우리는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보완하면서, 권리의 법적 체계 속에서 내적으로 얽히도록 하는 하버마스의 시도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는 법의 합법성에서 그 정당성이 발생하는 법규 내 법적 타당성의 본성을 스스로 “권리의 논리적 기원(a logical genesis of rights, Ibid., 121)”이라 명명한 것 속에서 해명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권리의 논리적 기원을 통해 하버마스는 어떻게 법과 민주주의를 연결 짓고, 자유롭고 평등한 공존의 조건을 이론적으로 설계하고자 했을까요?
> 다음 회차에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