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격
이 연재글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영어명-Between Facts and Norms/독일어명-Faktizität und Geltung)을 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작업으로써, 하버마스 저작에 관한 이 해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반추하는데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Prologue부터 순차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의사소통 권력과 행정 권력 사이의 순환을 통해 하버마스가 그리는 입헌 국가의 외관 초입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적 법치 국가가 정치권력의 분배뿐만 아니라, 합리화를 통해 이 권력의 폭력성을 벗겨내야 하는 한, 하버마스에게, 의사소통 권력과 행정 권력 간의 피드백 관계는 필수적입니다. 그는 행정 활동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것은 정당화 담론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74).
I. 이상적인 입헌 국가(Rechtsstaat)
의사소통 권력과 행정 권력 간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서술은 우리를 그가 그리는 입헌 국가의 이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국가 권력이 의사소통 권력을 따라 제정된 법률에 의해 정당화되고 따라서 정의의 원천으로 기능을 할 수 있는 한, 이 권력은 단순히 법적 형식만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견 형성과 의지 형성의 담론적 과정 속에서 모든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법 만이 정부 권력의 시행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입헌 국가는 행정 권력이 이러한 법안들과 묶여있는 방식에서 이 권력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공적 행정 체계 속에서, 행정 권력은 항상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새롭게 쇄신("in the system of public administration, there is concentrated a power that must always regenerate itself anew out of communicative power."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996, 169)"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하버마스가 보기에, 입헌 국가의 제도들은 한 공동체의 정치적으로 자율적인 자기 조직을 촉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공동체는 또한 (제도화된) 권리 체계를 통해 법적으로 동등하고 자유로운 개개인의 결사체로써 스스로를 구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버마스는 입헌 국가가 의사소통 권력을 생산하고, 이 권력을 행정 권력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장하는 “중요한 법적 제도들과 기재들”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II. 입헌 국가의 조건
재차 담론-이론적 틀 속에서 이해되는 하버마스의 입헌 국가 개념은 민주주의 이상을 도모하면서 개개인의 사적, 공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기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펴본 것처럼, 그는 입헌 국가를 단순히 법적, 정치적 구조의 집합체로 보지 않습니다.
그 보다, 하버마스는 입헌 국가를 시민들의 의사소통적 자유와 민주적 의지 형성의 구체화(embodiment)로 이해하는데, 여기서 국가의 행정 권력은 반드시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입헌 국가의 원리들은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이 스스로를 정치적, 법적 기획에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 이러한 기획의 “합리적 적용과 행정적 이행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순환" (to circulate throughout society via the reasonable application and administrative implementation," Ibid., 176)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입헌 국가는 권리 체계를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하버마스는 법적 매개체가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에서 약한 통합적인 흐름을 강화하는 변압기" (a "power transformer that reinforces the weakly integrating currents of a communicatively structured lifeworld,” Ibid.)로써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시민들의 기대를 안정화 함으로써, 그리고 이들의 집합적 목표를 실현함으로써 사회 통합이 성취되는 방식을 윤곽화 하는데요.
이 맥락에서, 민주적 법률에 관한 하버마스의 해석은 “상호주관적으로 형성된 의지 권력과 정당한 입법 절차에 내재한 이성" (the “power of an intersubjectively formed will and the reason inherent in the legitimating procedure," Ibid., 189) 간의 조합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에게, 법 규정이 그 타당성을 “토론과 공개적 투명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절차 속 시민 대표의 승인” (the “approval of the people’s representatives in a procedure characterised by discussion and publicity," Ibid.)을 통해 획득하는 한, 법적 정의는 법 제정의 민주적 절차로 보증되는 것이지, “규범의 내용이 따라야 하는 선험적 원리들” ("a priori principles to which the content of norms would have to correspond," Ibid.)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이 연재 말미에서 보게 될 것처럼, 하버마스에게, 입헌 국가는 단순히 시민들의 사적 자율성과 법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행정 권력은 오직 이 민주적 법률의 틀 속에서 시행될 때 만이 정당하고, 따라서 그 중요한 의미를 얻게 됩니다 – 본질적으로 기술적이지만, 억압적이지 않은 그 고유한 의미.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법을 매개로 개인과 국가가 상호 구성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에 주목했던 하버마스의 시도를 떠올려 봅시다.
이러한 입헌 국가에 관한 하버마스의 시각은 전통적인 입헌주의, 특히 개인의 자유와 조직화된 국가 권력 간의 직접적 대립 구도를 전제로 하는 독일 입헌 법률의 자유주의적 전통과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III. 시민 사회, 그리고 공론장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 입헌 국가의 구성 속에서, 자기 입법을 통한 법적 주체들의 “수평적 결사체” ( the “horizontal association”)는 개념적으로 “국가 속 시민들의 수직적 조직”(the “vertical organisation of citizens within the state,” Ibid., 135)의 일부가 됩니다.
이 통합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공적 자율성을 행사하는 자기 결정에 관한 관습들의 제도화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제도화는 정치적 공론장 속 비공식적 의견 형성, 정당 안팎의 정치적 관여, 보통 선거의 참여, 그리고 의회의 심의와 결정 과정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이러한 제도화를 단순히 “대리인" (a “deputy” or “proxy”) 모델로 보는 것에 주의하는데요.
왜냐하면 여기서 대표자들에 의한 담론들은 단순히 “비공식적 의사소통의 사회-전체적 순환에 있어 조직화된 중심점 혹은 초점” (the “organised midpoint or focus of the society-wide circulation of informal communication,” Ibid., 182)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버마스에게, 그리고 아마도 다른 이론가들에게, 국민주권의 원리를 글자 그대로 의사 형성 및 의지 형성의 논증적 과정으로부터 관련된 모든 이들의 집합적인 구속력 있는 모든 결정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재구성한 입헌 국가 속에서, 하버마스는 이 원리의 실현을 위한 토대로써 공론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초기 작업부터 지속해서 강조해 왔던 것처럼) 민주적 공론장에 관해 하버마스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 다음 회차에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