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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윤 Apr 06. 2021

상처에서 벗어나 변화가 어려운 이유

#3. 상처에서 벗어나 변화가 어려운 이유

상처로 구겨진 마음. 언젠가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햇빛과 유리된 그늘진 마음은 세상을 객관적 시선으로 조망할 수 없다. 

어둡게 채색된 렌즈로 세상과 사물을 어둡게 바라보게 된다. ‘피해자’라는 정체성의 옷을 입고서 세상 파도에 맞서 싸울 수 없다. 


상처의 고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도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 변화된 삶을 간절히 원한다. 


상처를 준 타인과 환경을 탓하고 원망함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채, 고통을 곱씹고 사는 삶의 결과를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을 포기하길 원하고, 그럴 의향까지 있지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마치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필사적으로 줄을 잡고 있는 암벽 등반가와도 같이 절대로 증상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때 그 사람 입장에서, 그의 내면 상황을 이해해보면, 그가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퇴보하고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그런 부적응적 행동을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는 그게 최선인 것이다. 달리 다르게 행동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온갖 증상을 만들고 병리적 패턴에 머물게 된다. 


이런 분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벽에 매달린 암벽등반가에게 밧줄을 놓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이리도 변화는 어려운 것일까?


심리학에서는 ‘자기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압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패턴을 되풀이하는 친숙함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복의 대가가 치명적이고 삶을 갉아먹는데도 과거의 패턴을 왜 고집하는 것일까? 


고통을 느끼고 있어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행동을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상처를 뒤로하고 변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변화를 꾀하는 시도가 자신의 존재방식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 과정에서 일종의 해체불안에 처한다. 주로 나타나는 반응에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토로한다. 이 때문에 다시 과거의 친숙한 비적응적 패턴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상처 입은 ‘피해자’라는 그동안 자기를 규정해온 정체성의 상실은 본래의 자기 상실로 이어진다. 나쁘고 원하지는 않지만 익숙해져 버린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애착으로 자신에 대한 느낌을 유지하는 것이다. 원치 않지만 원하는... 이렇게 복잡다단. 치밀하게 움직이는 무의식의 역동이 놀랍지 않은가? 


변화는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저항은 완강할 수밖에 없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상태에서 줄을 놓아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그동안 자신을 잡아주고 있다고 믿던 것을 놓아버릴 때 양자적 도약으로 이어진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다. 


세상을 탓하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던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가져와 스스로 자신의 생각, 감정에 책임을 지는 삶만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자립, 자존의 삶으로 자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심리적 중력과 반대로 노를 저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 


삶에 책임을 지는 자유인으로 살 것인지, 피해자로 살 것인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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