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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윤 Apr 02. 2021

상처는 영원하지 않다.

#2. 상처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이라는 불가해한 대상 속으로 어느 날 던져졌다. 

세상이라는 만만하지 않은 어려운 적수에게 쫓기며 다양한 상처를 입고 입히며 분투하며 살아간다.


광대한 우주 시간에 비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 

아침 안개처럼 찰나 같은 삶이지만 저마다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일들은 몇 천 톤 이상의 상처와 허무로 우리 마음을 잿빛으로 물들게 한다.


삶의 실상은 불안정하다. 


니체는 삶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인을 ‘권력’으로 보았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에도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 삶에 권력을 휘두른다. 그 권력은 현재의 삶을 굴복시키고 압박해 온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해, 상처에게 권력을 부여한 채 그것이 인생이라며 자위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인생의 상실과 고통, 상처에 대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짜라투스트라의 서설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이라는 것은 심연 위에 걸쳐져 있는 밧줄과 같다. 건너가는 것도 힘들고, 돌아서는 것도 힘들고, 멈춰 서 있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 같다. 


인간에게서 가장 좋은 것은 그가 하나의 변화이자 몰락이라는 것이고,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의 다리이지 어떤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변화의 여정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목적이 아닌, 과정 속에 묵묵히 초인(위베멘쉬)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인간의 운명은 비관해야 할 측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기존의 삶의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삶에는 목적지가 없다. 지평선 끝까지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삶이 끝날 때까지 도달했다고 만족하는 순간 지평선은 또 멀리 떨어져 펼쳐진다. 


때로 지치고, 때로 상처 입고, 때로 쓰러지기도 하며 저마다 삶의 숙제를 풀며 성숙의 과정 속에 있다. 

삶은 상처의 연속이다. 영원한 상처는 없다. 인간의 위대성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이다.


니체의 주장대로 운명의 허무를 넘어서 초인(위버멘쉬)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기존 삶의 방식을 극복하는 인간인 초인을 향해 걸어야 한다.  


상처. 트라우마는 삶의 자산으로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걸림돌은 언제든지 디딤돌로 전환될 수 있다. 인생을 더욱 성숙시키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는 극복과정을 통해 인간이 생래적 본성에 품고 있는 높은 회복탄력성을 활용할 수 있다. 


인생의 부채였던 상처가 자산으로 변화되는 축복의 전화위복은 언제나 가능하다.

상처에게 부여한 권력을 우리가 능동적 주체로 되찾아 올 수 만 있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해오는 트라우마는 정신과적 약물치료와 상담도 병행되어야 함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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