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로 녹음하는 노래
유년시절 나의 가장 좋은 장난감은 전축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브랜드, 태광에로이카 오디오였다. 라디오, 테이프, CD, LP 모두다 재생이 가능했던 나름 귀한 녀석이었지만, 궁금한게 많아 조금 거칠게 다루었다. 라디오 녹음하기와 같은 올바른 사용법 말고, 헤드폰 자리에 마이크 꼽기, CD 뒤집어 넣어보기 등 온갖 실험은 다 해보았다. 여러 놀이 중에 아버지가 가장 하지 말라는 놀이는 턴테이블로 LP에 스크래치 소리내는 것이었다. (쀠빅쀠빅)
"여기 작은 틈에 - 소리가 조각 되어있는거야."
아버지는 강제로 긁으면 소리가 망가진다며 종이로 한번, 비닐로 두번 꽁꽁 매어 놓았다. 나는 소중히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한번, '저 작은 틈에 소리가 들어있다니'하는 신기함에 두번 감탄하였다. LP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소리의 조각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니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평소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적 잘 놀기야 했지만 성장기를 거쳐오며 아버지의 무기력함, 무능함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들고는 미워한적이 많다.
그래도 플레이리스트라는 귀한 유산을 물려받은건 분명하다. ABBA, Carpenters 는 기본으로 많이 들었고, Village People <YMCA>가 나오면 온가족 막춤시간이 펼쳐졌다. 어린나이에 왬과 조지마이클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도 꽤 뿌듯했다. 아버지의 소중한 노래들은 내게도 소중했다.
지루해지면 마이클 부블레, 성시경버전까지 들어가면서 오랫동안 플레이리스트에서 내려가지 않았던 곡. 어렸을 땐 철학적인 비유가 포함된 가사가 잘 이해 안되었다. 조지마이클의 개인사와 연관되어있는 가사를 상상하면 느낌도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You are far ㅡ
당신이 멀리 있다는 이 짧은 한마디.
째즈팝의 따스한 느낌과 역설적으로 어울리며 그 ‘당신’을 향한 아련한 감정을 만든다.
조지마이클 특유의 부드럽고 힘있는 목소리를 듣자하면 없던 짝사랑도 생길 듯 하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커다란 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수첩에 영어 가사를 써가며 외웠다. (비틀즈 예스터에이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예쁘다는걸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는 코인노래방이 막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코인노래방은 오락실 한켠에 있는 기계였는데 300원 가량하는 고가의 부스가 있었다. 녹음실처럼 팝필터와 테이프 녹음 시설이 갖추어진 곳이었다. 가수라도 된 것처럼, 일주일 전부터 불러야 할 곡을 고르고 노래를 부르고 떨리는 마음으로 녹음을 했다.
녹음용 테이프가 따로 있나, 테이프 윗단 구멍을 꾹꾹 막아서 붙여놓고 쓰면 된다. 하지만 이런 공들이는 녹음에는 비싸더라도 속이 훤히 보이는 새 공테이프로 해야한다. 물론 재녹음이긴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꼭 이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줘야지. 마음을 담아 몇 곡 녹음하였다. LP 처럼은 아니지만 소중한 마음이 소중한 사람에게 닿기를 한 소절, 한 음 꾹꾹 눌러 자국을 내었다.
I guess you were kissing a fool
당신은 바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You must have been kissing a fool
당신은 바보를 사랑하고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물론 지나간 인연이야 있었고 절절한 짝사랑도 있었지만 이 테이프를 주진 못했다. ‘진짜 내 사랑일까’ 라는 이상한 낭만과 불신 때문이었다. 지금 보면 어리고 못난 마음이지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있나. 중요한 톱니바퀴 하나 같은 마음을 고이고이 담은 테이프는 전축 옆 엘피판 사이로 숨었다.
군복의 어색함이 사라졌을 때 쯤.
사랑의 영광과 상처,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내게도 굳은살 같은 자국이 남기 시작할 때 쯤.
테이프가 세상 밖으로 다시 등장 했다.
휴가를 나왔을 때 아버지는 군복도 벗지 않은 날 보고 한마디 했다.
“난 그 팝송 보다 조성모 노래 부른게 좋더라.”
우리집은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축을 정리하다 그 테이프가 나왔다.
낡은 전축은 이제 버려질거란다. 턴테이블도 카세트도 커다란 스피커도 이제 없어진다.
비치보이즈, 마이클잭슨, 프랭크시나트라 다들
아빠의 창고로, 옷장으로 흩어졌다.
한 때 소중했던 것들을 모두 정리하는 때, 테이프에 녹음하던 그 마음이 튀어나왔다.
녹음 테이프는 아버지의 자동차로 옮겨졌다. 빨간 테두리의 이름표 스티거에는
꽤나 진지한 글씨체로 kissing a fool이라 적혔다.
창피했지만,
비밀의 톱니바퀴를 찾았다.
예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기대하고 마음을 다잡던, 그런 내가 떠올랐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흩어진 LP에 차분히 쌓인 먼지처럼
아버지의 머리는 하얘졌다.
아버지와의 추억들은 흩어졌지만,
그 테이프를 녹음하던 마음에서 아버지를 엿볼 수 있었다.
노래 가사처럼 바보를 사랑하고 있던건 나였다.
뭐 대단한 사랑의 상처라고 세상 풍파 다 겪은 것 마냥 마음을 굳히고 사나.
아버지는 여전히 ABBA를 좋아하고 여전히 감자탕을 잘 만드는데 왜 그리 미워했나.
바보처럼 사랑하던건 나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부르는 노래같다.
멀리있던 아버지가 조금 가까워졌다.
You are far, When I could have been your star,
You listened to people, Who scared you to death, and from my heart,
Strange that you were strong enough, To even make a start,
But you'll never find Peace of mind, Till you listen to your heart,
People, You can never change the way they feel,
Better let them do just what they will, For they will,
If you let them, Steal your heart from you,
People, Will always make a lover feel a fool, But you knew I loved you,
We could have shown them all, We should have seen love through,
Fooled me with the tears in your eyes, Covered me with kisses and lies,
So goodbye, But please don't take my heart,
2016년 크리스마스. 거짓말처럼 조지마이클이 세상을 떠났다. 라스트크리스마스의 주인이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나다니 만우절 농담같은 이야기였다.
블랙 마이클과 화이트 마이클로 견줄 정도로 조지마이클의 명성은 대단했다. wake me up before you go go, careless whisper, last christmas 전주만 들어도 정서가 생기는 이 wham의 곡들이 전부 조지마이클이 만든 곡이었다. 작사, 작곡, 보컬 능력 모두 우수한 인재였으니 팀의 중심은 그 에게 쏠려있고 불균형에 따른 해체는 어쩌면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소개한 kissing a fool은 그의 솔로 1집 앨범 곡이다. 1위를 안겨주지 못한곡이지만 faith 말고 one more try 말고 이 노래도 들어보자.
그가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난 후 주변인들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들 이어나가고 있다.
조지마이클. 외로운 조지 마이클.
당신도 바보에게 키스하고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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