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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08. 2019

[여행일기] 옴냐, 옴냐, 옴냐!

"이집트인들은 죄다 사기꾼이야!” 나는 속으로 크게 외치며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서는 황급히 철문을 빠져나왔다. 히잡을 쓴 이집트 여성들 틈에서 카이로 동물원을 혼자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사자 보고 싶니?” 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자? 으응..사자 보고싶지.” 무심코 대답하자 그 남자는 씩 웃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회색에 가까운 베이지색의 동물원 관리인 작업복을 입은 그를 나는 한 점 의심 없이 믿었고 그 남자를 따라 들어간 철문 안에는 철창에 갇힌 무기력한 사자 한 마리가 진짜로 있었다. “우와, 진짜 사자네.” “자, 사자 만져봐.” 철창 밖으로 삐져나온 사자의 털 몇 가닥을 쓰다듬어 보았다. 사자가 어찌나 무기력한지 더 길게 구경할 것도 없어서 “사자 보여줘서 고마워.” 라고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자세를 취하자 그는 철컹 하고 철문을 닫았다. “10파운드 내.” “뭐라고?” “사자 보여줬으니까 10파운드 내라고.” 지금 이 공간에는 나와 이 남자 그리고 무기력한 사자, 이렇게 셋뿐이다. 나는 거의 강탈 당하다시피 10파운드를 내고는 무서우니까 속으로만 “사기꾼!!!”을 외치며 철문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린다고 차렸는데 이렇게 맥없이 당해버렸구나 하는 허탈감과 나의 하루가 이렇게 망쳐졌다는 허무함에 멍하니 벤치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Where are you from?"또 뭐야? 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봤을 때 그 곳에는 20살 쯤 되어 보이는 히잡을 쓴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띠고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국에서 왔는데"“정말? 한국에서 왔어? 우와. 저기 우리 가족 있는데 같이 가서 놀래?” 그녀의 이름은 소망을 뜻하는 옴냐. 열여덟 살의 호기심 많고 밝은 아가씨다.


오늘 벌써 이집트인에게 한 번의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녀의 티없이 맑은 미소는 굳게 잠겨버린 나의 마음을 열쇠처럼 단번에 열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한번 속는 셈 치고 그녀를 따라가 보았다. 대 여섯 명 쯤 되는 한 무리의 가족이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있었는데 피부색도, 눈 색깔도 다른 처음 보는 이방인을 그들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듯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물론 감정을 투명한 유리창처럼 내보이는 어린 아이들은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블레이! 블레이!“ 말괄량이 같은 성격의 옴냐의 사촌동생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꾸만 블레이라고 외친다. 블레이가 뭐지? 아, 아랍어에는 P발음이 없지. 플레이! 같이 놀자는 거구나. 그래, 같이 블레이하자. 한참을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장난을 치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노는 동안 이집트인들에 대한 반감은 어느 새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우리 이제 집에 갈 건데 같이 가자!”옴냐의 초대에 나는 덜컥 “좋아” 라고 대답해버렸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절대 늦추지 않는 나인데, 옴냐와 그녀의 가족들의 따뜻함에는 잠시 경계의 끈을 놓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니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가량이나 달린 후에 옴냐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의 집은 전형적인 이집트 서민 가정이다. 흙벽으로 대충 지은 듯한 건물과 한기가 도는 실내.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 역시 친절하게 이방인을 맞이해주시고는 손님맞이 음식 준비로 바쁘시다. 옴냐는 자기의 히잡을 꺼내 나에게 씌워주고는 좋다고 웃는다. 옴냐의 방을 구경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한참을 재미있게 노는데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는 어머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가니 어느새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으셨다. 이집트식 코샤리, 고기국, 샐러드.. 옴냐가 가르쳐준대로 손으로 음식을 먹자 모두들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이게 뭐 별거라고.. 그대들이 원한다면 손으로 국도 퍼 먹겠소!


방청객 같은 그들의 호응에 우쭐해진 나는 서툰 아랍어로 1부터 10까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숫자를 세어 보인다. 온 가족이 또 꺄르르 웃는다. 핸드폰도 없고 이메일 주소도 없는 옴냐와 꼭 편지하기로 약속을 하고 저녁 느즈막히 그녀의 집을 나오는 길. 물질 문명에 찌든 현대인의 세속적인 눈으로 판단하자면 근심 걱정이 가득해야 할 것만 같은 변변치 않던 옴냐네 집에 가득하던 웃음과 행복 그리고 환영은 이방인의 시멘트 옹벽 같던 삭막한 마음을 핑크빛 페인트로 곱게 칠해주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다시 이집트에 가게 되었을 때 그녀의 집에 다시 놀러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양손 가득 달디단 이집트식 디저트 헬와를 들고 찾아갔다. 이번엔 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초대해 헬와보다 달콤한 시간을 선사해주었던 옴냐.


서로 일이 바쁘다보니 편지 연락은 끊긴지 오래지만 옴냐 덕분에 나는 언제나 이집트를 생각할 때마다 건조한 3월의 모래바람과 길거리에서 집적거리던 이집트 남자들의 기분 나쁜 기억보다는 헬와처럼 달콤했던 옴냐와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 추억 속에서는 먼지가 폴폴 이는 카이로의 어느 변두리 흙밭길도 전라북도 진안의 시골 할머니댁 흙밭길 처럼 정겨워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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