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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11. 2019

[비행일기] 환상의 파트너


이건 비행 몇년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다. 이코노미 클래스의 화장실에서 마치 폭포수가 흐르듯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막 두 번째 식사 서비스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비행은 언제나 그렇듯 채식밀을 미리 주문한 승객들이 매우 많다. 오늘도 역시 100개가 넘는 스페셜밀을 일일이 손으로 나르고 있는 중이었다. 양 손에 들고 있던 베지테리언 밀을 승객에게 던지듯이 가져다드리고는 폭포수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세면대의 수도꼭지가 완전히 분리되어서 물이 마치 분수처럼 사방으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세면대에서 넘치는 물이 화장실 바닥을 거쳐 객실 바닥으로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유니폼이 젖을새라 화장실 안으로 팔만 뻗어 부러져버린 수도꼭지를 다시 원위치로 붙여보려고 했지만 이건 그냥 부러진 꽃을 원래대로 붙이려고 하는 것처럼 속절없는 일이다.


일단 문을 닫고 저 폭포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마나 망설이고 있는 찰나, 역시 스페셜밀을 나르던 에릭이 그 광경을 보고서는 본인이 용감하게 폭포 안으로 들어가겠단다. 자기는 화장도 안했고 머리도 안했으니 괜찮단다. 자식.. 또 나름 남자라고.. 감동이다. 에릭이 폭포수 아래서 수도 밸브를 열심히 찾는 동안 나는 테이블 클로스와 좌석 주머니 안에 있던 책으로 에릭의 등과 머리를 열심히 가려준다. 그 와중에 승객들은 일어나서 우리를 구경하며 낄낄 웃는다. 폭포처럼 넘치는 물을 맞으며 허둥지둥하던 우리 모습이 퍽 웃기기는 했을 것이다. 우리를 도와주던 시니어 퍼서 조조는 “이게 뭐가 웃기다는 거야!” 라며 짜증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한참을 밸브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폭포를 잠갔을 때 나는 팔과 얼굴만 조금 젖었지만 에릭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우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버렸다.


“에릭! 고마워! 정말 수고가 많았어. 너 아니었음 어쩔뻔했어.”“아냐 리앤, 나도 고마워. 너 없었으면 이걸 어떻게 혼자 했겠어. 우리는 최고의 비행 파트너인 것 같아!”“야, 나 너랑 맨날 비행할래!”서로를 추켜 세워주며 화기애애하게 폭포 사건을 마무리하고 서비스를 이어가는데 에릭이 몸이 으슬으슬하니 안좋단다. 추운 기내에서 물벼락을 맞은 탓일 것이다. 샌프란에 내려 이민국 앞에서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갤리 퍼서들과 사무장이 아까 있었던 화장실 폭포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살짝 끼어들어 “있지, 막 물이 바닥으로 콸콸 쏟아지고, 분수처럼 막 솟아 올라서 내가 어떡할까 막 고민하는데 에릭이 멋지게 딱 들어가서 밸브를 막 잠갔다?” 약간 과장해가며 에릭을 추켜세워주자 에릭이 의기양양해한다. 


한참을 버스로 달려 호텔에 도착한 후, 말레이시안 크루 아즐란이 차를 렌트해 아울렛에 갈꺼라며 같이 갈 크루가 있는지 묻는다. 냉큼 가겠다고 하고는 옆에 있던 에릭에게 “에릭, 너도 아울렛 갈래? 같이 가자.” 하자 에릭은 “나는 다음 섹터를 위해 쉬어야겠어.”한다. “얼마나 스페셜한 서비스를 하려고 그래?”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에릭은 “스페셜한 서비스는커녕 비행이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 엄살을 부린다. 에릭이 푹 쉬고 다 나아서 홍콩으로 돌아가는 섹터에서도 나와 함께 다시 한번 멋진 파트너쉽을 발휘하기를 바래본다. 다음 섹터에서 또 수도꼭지가 부러지면 그 땐 널 위해 내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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