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공항 밖으로 나서자 예상 밖의 서늘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여기도 겨울은 겨울이구나. 지구 북반구가 겨울 여왕의 입김에 휩싸인 12월, 평소 힘들어서 기피하던 남반구로의 비행이 절실해진다.
크루버스에 올라타 한참을 야자수, 황토색 집, 고층 건물, 꼬부랑 글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 사우디에서 일하셨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 제 2의 고향!” 이라며 장난스럽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에 요리조리 사진을 찍어보았다.
누군가 그랬다. 엄마는 처음부터 나에게 그저 엄마였다고. 아빠도 처음부터 나에게는 그저 아빠였다. 아빠의 젊은 시절, 아빠의 열정, 아빠의 연애 따위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30줄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철이 들었는지, 젊디 젊은 28세에 머나먼 타국에 근무하러 온 풋풋한 아빠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도 결혼을 하고 외국에 많이 다니는 직업을 가져서인지, 그 시절 가장으로서 지고 있었을 아빠의 책임감, 이방인으로서 외로웠을 타국 생활이 마음 깊이 느껴져 가슴이 싸하다. 또 남편 없이 2년이란 시간을 시댁에서 혼자 지냈던 엄마는 어떻고. 시동생들 챙기랴, 시부모님 챙기랴,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이 보고 싶어 죽겠어도 내색 한번 못하고 묵묵히 시집살이를 했을 우리 엄마.
부모님이 겪었을 바다 위 풍랑 같았던 젊은 시절을 자식된 나는 결코 상상하지도, 상상하려 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어른이었고 부모님이었으니까. 사우디의 사막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사진 속 아빠는 어릴적 나에게는 그냥 어른 아빠였다. 하지만 지금, 사진 속 아빠의 앳된 모습과 함께 그 가슴속 열정과 책임감과 외로움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가 이제 그 때 아빠의 나이를 넘어서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