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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타르솔 Jan 25. 2023

갓 내린 커피에서 말린 고추 냄새가 났다

따땃하고 촌스럽고 그리운 그 느낌

 사는 곳 근처에 한 잔에 1500원 쯤 하는 무인카페가 있다. 어느 때에 가도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서넛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각자의 의식 세계를 부유하고 있다. 그 모습이 무언가 얼마 전에 본 아바타를 떠올리게 한다. 아바타 교감용 기계 속에 들어가 실제의 의식은 드넓은 판도라 행성의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속을 힘차게 걸어나가는 푸르딩딩하고 건강미 넘치는 장신의 육체들. 누군가는 보건학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행정법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형사소송법의 세계를 떠다니고 있겠지.


 할 일을 미루면서도 죄책감을 덜기 위한 나의 방어기제는 주로 적당한 재미와 적당한 정보 전달력을 갖춘 유튜브 컨텐츠를 감상하는 일이다.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과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굉장히 서로의 대화에 열중해서 생각을 나누고 교감하는 모습이 내게는 정말 부럽고 매력있게 느껴졌다. 최근에 누군가와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 저렇게 심도있게 몰두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지?


 유튜브의 댓글창을 열면 인터넷 세상 수많은 '누리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떤 이는 굉장히 정제된, 맞춤법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문단 나눔과 들여쓰기까지 완벽한, 읽으면서 황송할 정도의 문장력을 구사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듯한 원색적인 자기의 생각을 여과없이 끄적여놓고 다른 이들의 관심을 갈구하며 낄낄댄다. 그건 마치 공중화장식 벽에 낙서된 19금 낙서 같기도 하고 서울의 지하철이나 거리에 종종 보이는 어딘가 정신이 아파보이는 슬픈 이들의 들어줄 이 하나 없는 중얼거림 같이 들리기도 한다. 

요지는 그거다. 사람과 사람의 마주보면서 서로의 목소리가 음파가 되어 내 귓고막을 때리는 그런 대화가 나누고 싶은 그런 날. 만남의 반가움과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따스한 허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싸구려 레토르트 같은 디지털 세상의 소통보다 4d로 온전히 다가오는 그런 대화가 그리운 날이다. 

출처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거참 두 분이 맛깔나게 소통하고 계시네'. 오고가는 대화들이 너무 괜찮아서 메모장에 스크립트를 옮겨적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커피를 숭늉 마시듯 후루룩 들이킨다. 외로워서 입양한 화분들은 제법 을씨년스럽고 비루해보여질 뻔한 내 방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이번 주에는 집에 갈까? 나는, 엄마는, 그리고 아버지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외갓집의 풍경, 가난과 시골, 자연과 인간, 순수함과 우둔함, 근면함과 고단함.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떠한 대상을 기억할 때 순수하게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여러 생각과 감정, 기억들이 흘러들어 하나의 거대한 패키징을 이룬다. 마냥 좋다가 마냥 싫다가 마냥 안쓰러웠던 외갓집과 외할머니에 대한 감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정의 내리기 힘들어진다. 옅어지는 기억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사진을 업로드하면 대상이 웃거나 눈을 깜빡이게 해주는 기술도 개발되었다는데, 집에 가면 외할머니 사진을 스캔해서 업로드해봐야겠다.

고추말리기 출처 여주신문

그런 '시골적 단상'속에는 외갓집 시골 마을 집집마다 볕드는 마당 한구석, 널찍한 바위 꼭대기에 얹어놓은 말린 고추들이 있다. 그 주변을 지나갈 때 나는 약간은 텁텁하고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있다. 어릴 때는 너무 싫었다!! 으으으 도시소년은 절규했다. 20년 만에 그 냄새를 이천원 짜리 커피에서 맡아본다. 다시 맡아보니 꽤나 괜찮다. 이렇게 나이가 먹어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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