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점심은 없어도 공짜 노동은 있었던 10주
"게임회사 인턴" 이전에 "대기업 인턴"이었다.
10주간의 인턴생활, 인사팀에서는 드레스코드는 정장이라고 안내했다.
새로 산 셔츠 깃은 다리미 자국이 반듯했고, 구두는 새로 사서 아직 발을 긁었다.
인턴 합격을 하고, 인턴 동기들끼리 인사를 나눴다.
의지가 되는 동기이지만 이중 몇몇은 떨어질 사람, 혹은 내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은 경쟁자이리라.
그때 나는 10주란 시간만 지난다면,
마치 번데기를 거친 나비처럼 완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출근길 지하철을 나와 빌딩숲의 그늘로 들어가던 순간에도,
14층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순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바뀌게 마련이다.
완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찰나의 시간은 지나고 책상에 앉은 지 20여분, 30분 정도 지나면 어느덧
조금씩 미생으로서의 자아만 남았다.
인사팀에서는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기에 인턴들의 과제는 과제대로 하면서
현업부서에 들어가서 일을 하며 또 일을 직접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각 부서의 사수가 멘토이니, 멘티와 멘토의 멘토링 관계로 이것저것 물어보라고 했다.
좋은 이야기다.
인사노무관리론 교과서에 따르면, 멘토링이란 조직생활의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사람이
신입사원에게 조직의 공식적, "비공식적" 규범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관계라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사수 H는 해병대 출신이었다.
생긴 것도 나와 비슷하게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업무든 복장이든 태도든 각잡힌 것을 참 좋아했다.
팀장 M은 과묵했다.
내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팀장과 사수가 같이 담배를 피고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담배를 피지 않는 내가 사수와 함께 옥상으로 가는 일들이 반복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모두 좋았다.
나는 배우는 것이었고, 혹독하게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사노무 교과서에서 말하는 "액션러닝"(Action Learning, AL)을 접목시킨 방법이라고,
아마 인사팀에서는 평가했을 것이다.
일하면서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점심은 인턴인 우리가 스스로 사먹거나, 아니면 제공된 식대가 있으니 인턴사원증으로 카드를 찍으면 결제되는 시스템이었다.
"점심 제공". 너무 당연하고 필수적인 복지로 들렸다.
늘상 점심과 함께 저녁도 회사에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말이다.
일찍 들어가면 밤 9시나 10시였다.
새벽 1시에 들어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빡세게 일하고, 빡세게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땐 노동법이니, 근로기준법상의 권리니 하는 것보다 사람 구실 하고 월급받는 게 더 중요한 과업이었다.
3주차였나, 4주차정도 지났을까, 동기 중 한 명이 중도퇴사했다.
사유는 간단했다. "이러려고 태어난 건 아니다."
오후 2시에 짐을 챙겨 나갔다. 그는 그와 친한 동기들에게 그 순간에
"너무 기분좋은 오후다!"라고 카톡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저게 무슨 짓인가 했다.
그때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3월 14일 오후 5시 36분,
나의 우리은행 계좌에 "인턴급여"란 명의로 1,321,640원이 들어왔다.
통장 잔액은 77013원에서 1,398,653원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떠난 자에게 "집이 잘 사나 보네"하고 부러움과 시기 그 어딘가의 생각을 했었다.
그땐 정말 몰랐다.
새벽까지 일해도 인턴 급여 받으면, 월급 받으면, 그리고 내가 완전히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인턴인데!
내가 완전히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배우면서 일하는 건데! 이 정도만 받아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전사회적 가스라이팅이었다.
인턴은 근로기준법상의 시용근로자 또는 수습근로자다. 혹은 그 어딘가 중간의 법적 지위를 갖는다.
내가 다녔던 기업은 대기업이었다.
수습은 최저임금의 90%를 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1년 이상 근로계약을 체결한 경우의 수습기간 3개월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10주의 인턴 근로계약서를 작성했었다.
이도저도 아니었다. 확실한 건 노동법 위반 단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회사에 남는 것은
그저 나의 배우고자 하는 헌신이었고, 게임 신작의 테스트와 유저 입장에서의 보완개선점 찾기라고 하는 것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석됐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걸 하는 거였지만, 당연하게도 회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었지만 그 회사에 공짜노동은 있었다.
3년 후 내가 서울시 노동관련 민간위탁기관에서 일할 때,
노동상담전화가 걸려왔다.
"인턴사원도 시간외 근로수당을 받을 수 있나요?"
"당연하죠. 근로계약 명칭과 상관없이 1일 8시간 또는 1주 40시간 초과한 연장근로에 대해서는 1.5배의 연장근로수당 청구권이 인정됩니다. 야간근로, 휴일근로도 당연하고요."
그래도 그때는 완생이 되고자 했고, 완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이악물고 버텼고,
새벽에 돌아온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잠부터 잤다.
나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였다.
인사팀에서는 이야기했다.
"40명을 다 뽑을 수도 있고, 다 안 뽑을 수도 있다. 정해진 TO는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달콤하고 잔인한 희망고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실 TO는 정해져있었다. 18~22명 사이였다.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 것 또한 채용절차법상 사용자의 고지의무를 넓게 해석하면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야 아무렴 어떤가.
그런 말을 들은 인턴에게, 합격도 불합격도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기 전까지, 그 10주간은 다들 마음의 얼굴이 오징어가 되어가는 오징어게임이었다.
인턴 최종 과제 발표는 마지막 주차에 있었다.
자신이 속한 부서의 사업적 문제점, 개선점을 찾아 어떻게 개선했으면 좋겠다고 발표하는 것.
발표를 1주일 앞둔 2014년 4월 16일,
진도 바다에서 무슨 수학여행가던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을
TV뉴스로 보면서 13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교통사고가 꽤 크게 났었네. 다행이다. 하고.
그리고 또 정신없던 배움과 갈굼과 침전의 시간...
세월호 침몰사고가 나중에 그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고, 심지어 거기에 쓸 정신도 없었던 시기였다.
내 삶이 너무 급했으니까.
회사에서도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하는 이야기는 그저 모노폴리 비슷한 게임과
내가 가진 몬스터 캐릭터를 5성을 6성으로 기를려면 평균적으로 얼마를 충전해야 하는데 BM이 어떻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주로 오갔다.
시사나 정치뉴스는 그저 사치였다.
인턴사원들에게는 "위대한 게임 문화를 만드는 회사"를 만들기 위한 끝없는 열정이 필요할 뿐이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회사의 것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내 인생, 나의 시간이 모두 회사의 것이길 바랐다.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으니까.
부모님에게 손 안 벌리고 나 혼자 건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 구실.
그래서 정규직 전환,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그저 좋았다.
이제 연봉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 신입사원이 되었구나.
이제 임직원 35% 할인을 받는 카드가 발급받겠구나.
이렇게 몇 년만 참으면 완생이 머지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완생을 위해 마지막 칸까지 다 채운 지하철 노선도처럼, 이제 종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런데 내가 탄 지하철은 2호선 내선순환 열차였다.
그 노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