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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23. 2021

만원 두 장으로 누린 호사

성호의 글




ⓒ Pixabay, okaybuild


우리 둘은 ‘나간 김에’ 일처리를 한 번에 하는 것을 선호한다. 둘 다 집에 있기를 좋아해서 외출할 일이 많지도 않은 데다가 환경 문제, 택배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 등을 생각해서 온라인 쇼핑도 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는 필사 도구로 쓰려고 라미(LAMY) 만년필을 하나 장만하고자 했다. 마침 며칠 뒤에 민경이와 뮤지컬을 보러 대학로에 가기로 되어있어서 나간 김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 사 오기로 했다. 



그날 대학로에 도착하자마자 텐바이텐과 그 맞은편의 아트박스에 들러 라미 만년필이 있나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두 곳에는 없었다. 단념하고 일단 카페로 갔다. 뮤지컬 시작 전에 미리 저녁을 먹고 여유롭게 티켓팅을 하러 가는 길에 다시 만년필 생각이 났다. 단념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나온 외출인데, 이대로 포기하긴 일러! 어느새 원래 외출 목적이 뮤지컬 때문이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별안간 ‘끌어당김의 법칙’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간절하게 원하면 그것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마법의 법칙 말이다.



정신을 집중하니 가까운 곳에서 라미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내 안테나는 우측에 보이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민경이의 안테나는 좌측에 보이는 혜화문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선 나의 촉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았다. 허탕이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민경이의 촉이 가리켰던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문방구로 보이는 그곳의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거기엔 라미 만년필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라미 만년필이 딱 한 개 남은 게 있었다. 모델도, 색깔도, 펜촉도 모두 다 내가 찾던 그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가 있나. 깨끗하게 닦인 유리 진열대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그것을 집어 들자 만년필이 씨익 미소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봐, 역시 해낼 줄 알고 있었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라미 만년필을 검색해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인터넷 최저가보다 약 2만 원이나 더 주고 샀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있나. 심지어 라미 공식 홈페이지에서조차 상시 할인가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끌어당김의 법칙까지 쓰는 생난리를 쳤단 말인가. 허무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더 싸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에서 합리적이고 알뜰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구매했다면, 과연 오늘과 같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단군 이래로 물건을 구매하기 가장 쉬운 시대다. 마음만 먹으면 1분 안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할 수 있다. 무심한 표정과 엄지손가락만 있으면 된다(아, 물론 잔고도). 하지만 이렇게 구매한 제품에는 감정이 스며들지 않는다. 



만년필에 대한 단념과 집착을 반복하며 오르락내리락했던 나의 감정, 근처에서 라미 냄새가 난다며 민경이와 서로 촉을 세우며 웃었던 순간, 덕분에 여유로웠던 일정이 촉박해져 공연 시작 1분 전에 진땀을 흘리며 입장했던 기억까지. 앞으로 이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마다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라 미소가 절로 지어질 것이다. 인터넷 최저가로 편리하게 구매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호ㄱ.. 아니, ‘호사’다. 



누군가는 내 소비를 보며 2만 원을 낭비했다며 혀를 차겠지만, 덕분에 난 그보다 값진 추억을 내 만년필에 새긴 셈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인생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이 주는 재미를 한껏 느껴보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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