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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04. 2024

활 쏘러 가야 하는데 귀찮을 때

미루는 뇌에 관하여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작년에는 새해가 되자마자 나의 '공식 활 유니폼'인 개량한복을 차려입고 혼자서 정갈한 마음 상태로 활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차분하고 정돈된 마음의 느낌이 참 좋았었다. 차가운 아침 겨울 공기도 상쾌했고. 

작년 새해 첫 활쏘기 기록 영상 중

그런데 요즘 정신없어서 활을 게을리했더니 어느덧 3주째 활터에 오르질 못헀다. 습관이 몸에 정착하는데 최소 21일의 시간이 필요하다던데, 어느새 안 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갑진년 새해에 내건 부푼 기대와 희망을 활에 담아 저 과녁을 향해 띄워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막상 가려고 하니 괜히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기거나, 일이 없을 땐 뭔가 귀찮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활의 빈자리가 족쇄처럼 날 가두고 있는 나날이다.



올해 마지막 주말이던 12월 30일 토요일엔 그렇게 눈이 많이 왔다. 아마 수도권 기준 2023년 중 가장 많은 눈이 왔었을 것이다. 포근하게 쌓인 눈은 내게 겨울 감성을 물씬 피어오르게 해 주긴 했으나, 순전히 '풍경'으로 작용할 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눈밭이 되어버린 거리를 직접 뚫고 활터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차를 이용해서 가면 10~15분이면 도착이라 물리적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더 큰 탓이다.


또 며칠 뒤엔 연초부터 포근한 겨울 날씨가 이어지면서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 외출하는 것을 꺼리는 나는 이 날도 활터에 가는 것을 고사하고야 만다. 그다음 날엔 분명 나의 '활 유니폼'까지 챙겨 입고 굳은 의지로 밖에 나왔는데 비랑 우박이 같이 내리는 걸 보고 발걸음을 동네 카페로 옮겨서 책을 읽었다. 이성계도 울고 갈 회군이다.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너 활 쏘러 가고 싶긴 한 거니?라고 물어야 한다. 물었더니 또 그렇단다. 그럼 뭐가 문제니? 소요되는 시간이 적지 않은 것도 자꾸 미루게 되는 것에 한몫한단다. 그런데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스크린 골프도 나인홀 한 번 돌면 소요되는 시간이 있듯이. 활쏘기도 가볍게 30분만 하고 오는 그런 운동이 못된다. 근본적인 답은 못 내리고 자꾸 변죽만 울린다. 


나는 활 자체가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특정 조건에서 특정 방식으로 행해지는 활쏘기가 좋은 것이다. 공기가 맑고 비나 눈이 심하게 내리지 않은 날에, 차분하게 마음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한 발씩 화살을 과녁을 향해 보내는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리만큼 좋다. 그 곁에 소중한 사람이 함께 한다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활을 자꾸 미루는 스스로를 채근하다 보니 되려 나를 바로 알게 된다.



효율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한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해외의 유명 블로그 Wait but Why를 운영하는 팀 어번이라는 사람이 있다. 하루는 그가 TED 강연에서 '미루는 뇌'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의사결정에 작용하는 두 가지 존재가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본능적 존재인 '원숭이'가 그 하나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고를 하는 '의사 결정자'가 다른 하나다. 원숭이의 욕구를 적당히 달래주지 않으면 중요한 결정에 늘 훼방을 놓는다. 미루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원숭이를 억지로 쫓는 방법은 'X 됐다!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 그게 데드라인의 존재다. 데드라인은 결국 어떻게든 미루기가 끝나게 만든다. 


팀 어번이 설명하는 미루는 사람(우리 모두)의 뇌구조


바빠서 활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한 건 의사 결정자, 즉 이성의 의식적인 작용이다. 시간이 지나자 이유도 모른 채 자꾸 활 쏘기를 미루고 있을 땐 원숭이라는 본능의 무의식적 작용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것이다. 그런 원숭이와 대화를 나눠보며 합의점을 찾는 것이 의사 결정자가 해야 할 일이다. 서로가 만족스러워할 지점을 찾아내는 게 삶에서도 필요하다. 데드라인은 논외다. 생업이 아닌 취미의 영역에서까지 '데드라인의 압박'에 의해서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 



아유, 그냥 대충 가서 쏴~ 뭔 생각이 그렇게 많어~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다음 주에는 꼭 가야지. 

어휴 저거 저거 또 미루는 거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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