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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28. 2023

활쏘기의 기쁨과 슬픔

조건 반사적 반응을 피할 수 없다면

맞으면 기쁘고 안 맞으면 슬프다.

몸이 내 뜻 대로 되면 기쁘고, 안 되면 슬프다.


활을 쏘는 궁사라면 두 가지 영역에서의 반드시 희와 비를 느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외는 없다. 감정을 느끼는 것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문제는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과녁을 때리는 소리에만 쾌감을 느끼기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정신과 신체가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의식적이고도 주체적인 기운의 방사를 이뤄냈느냐에 쾌감을 느낄 것이냐의 문제.


관심을 두는 쪽으로 우리 몸과 마음은 반응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의식하는 쪽으로 마음의 감각이 예리해지고, 조건화된 반응이 형성이 된다. 과녁 아니면 컨트롤 둘 중 하나로.


물론 이건 편의상 두 영역으로 나누었을 뿐 그 두 가지의 영역은 서로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다. 하나로 맞물려 있다.


혹자는 과녁 맞히기에만 급급하여 자세가 어떻든 맞기만 하면 장땡이라 외치는 사람을 격이 떨어진다 비판하지만, 그 자신 역시 스스로가 온전히 컨트롤한 올바른 자세로 화살을 보낸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써 과녁에 맞는 소리를 들으면 씨익 웃는다. 그에게 과녁은 자신이 얼마나 잘 쐈는지를 보여주는 검증 도구가 된 셈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뭐 하러 과녁을 향해 쏘는가? 평생 주살질*만 하면 될 것을.


*'줄+살'에서 주살이 된 것으로, 활쏘기 기본자세를 연습할 때, 줄에 묶인 화살을 사용하여 과녁까지 보내지 않고 금방 거두기 좋게 만든 장치. 주살질은 사대가 아니라 별도로 마련된 주살대에서 쏘기 연습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짝궁이 주살대에서 연습 중인 모습


반대로 정말 과녁에 맞기만 하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나 바람이 도와서, 혹은 잘못 쐈는데 운 좋게 가서 맞는 현상만 계속 반복된다면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 사람 역시 스스로 자세를 점검하고 일관된 쏨새를 갖추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에게 자세는 과녁이라는 보상 체계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은 아니다. 그에게 목적은 오로지 과녁 명중이다.



바른 자세 유지명중 수, 그 사이에 놓인 교집합이 과녁이라 할 수 있겠다. 과녁은 두 영역 모두에서 지향점이자 영광이 된다. 궁사로서 화살을 내어 보내는 이상, 과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궁사로서 어떤 지향점을 갖든, 과녁과 치우침 없이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마음, 바로 평정심이라 생각한다.



과녁을 보고 있으면 기부니가 좋그등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활쏘기 기초 교육을 받을 때 당시 사범님이 해주셨던 말을 메모해 둔 것이 있다.


화살이 정중앙에  맞으려면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알맞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활을 밀어주는 힘이 부족하거나 당기는 힘이 너무 세면 줌손(활을 쥔 손)이 몸 안쪽으로 오면서 화살이 앞 나고(오른손으로 활을 쥐었을 경우 과녁 우측 방향), 활을 너무 세게 밀거나 당기는 힘이 부족하면 화살이 뒤가 난다(과녁 좌측 방향).  


분명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지만, 단어만 조금 바꾸면 과녁을 맞히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화살이 정중앙에 맞으려면 맞히려는 마음과 못 맞혀도 괜찮다는 여유로운 마음이 알맞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맞히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고,
못 맞혀도 괜찮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중요한 순간에 집중을 유지하지 않고 대충 쏴서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간다.


어떠한 경우든 평정심은 유효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평정심을 잃은 궁사는 궁사가 아니다.


평정심을 얻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과녁이다.


명중을 하고자 자세를 신경 쓰든, 자세를 바르게 해서 명중으로 그것을 증명하든 과녁은 여전히 건재하다. 과녁의 건재함과 평정심은 반비례 관계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기쁨과 슬픔의 롤러코스터를 멈출 수 없다면 아예 비워내 버리자. 비워내야 한다. 과녁을 잊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엄마 뱃속에서 '나온다'. 나오면서는 울음을 터뜨리며 첫 호흡을 '뱉어낸다.‘ 아이가 태어나서 울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 것이다. 뱉지 못하면 죽는다. 가지려고만 하다간 다 잃고 만다.


비워냄 속에 무언가 새롭게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과녁을 잊어야 과녁을 맞힌다.



과녁을 잊어보려 하는 중. 그치만 잊으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걸..



신기한 것이 과녁에 맞히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세에 집중할수록 화살은 가운데로 점점 향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물론 아직 그릇이 크지 않아, 한 발 가운데 맞히고 나면 그새 또 조바심이 들거나, 이제 됐다! 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어서 또다시 자세가 흐트러지고 만다.

 


마치 줄타기하듯이, 너무 기뻐서 쾌재를 불러서도, 안 맞는다고 초조해해서도 안 되고 계속해서 기본자세를 되뇌며 호흡을 가다듬고  어디 하나라도 빠진 건 없나, 놓친 건 없나 점검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도 바쁘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온다. 화살이 어떻게 나가는지는 발시하기 전까지는 관심 밖이어야 한다.     



활을 쏘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중요한 건 자세다. 단, 결과를 잊은 채 그 자체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단순한 논리를 과녁을 명중시키는 데로 주의가 옮아가면 쉬이 잊어버리게 된다.    



아이고 친구야, 몇 발자국만 더 나아가보지 그랬니..



과녁이 아니라, 화살이 아니라, 자세에만 신경을 쓰자. 배운 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천천히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그럴 때 나와 활과 과녁이 일직선상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과녁은 또 다른 나다. 그 '나'는 지향점이자 심판이다. 화살이 어디로 나아가서 어디를 맞는지는 내가 만들어 낸 에너지와 자세에 대해 즉각적으로 내려지는 '채점' 점수인 셈이다.



장차 자신의 한 몸이 활 속으로 들어가 과녁을 향한다.

-조선 후기 무인 이춘기의 <사해결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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