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눈이 빨개진 소녀는 마치 우는 것 같았다. 속눈썹 아래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떨어질 듯 말듯 걸을 때마다 반짝였다. 바람에 진눈깨비가 볼을 스치자 움찔하는 순간 눈물방울이 보일 듯 말 듯 날아갔다. 12월 초였지만 이미 한바탕 첫눈이 내린 뒤였다.
능선 따라 희끗희끗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하천은 아직 꽁꽁 얼지 않아 살얼음 밑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다닌 흔적과 여기저기 하얀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큰 골목길 끝 슈퍼를 지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끝에 소녀의 집이 있었다. 학교와 집은 적당한 걸음으로 30분 정도가 걸렸지만 이미 1시간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감각 없는 콧방울 사이로 자꾸만 흘러나오는 콧물을 훌쩍거렸다. 소녀를 아는 사람이 길에서 마주쳤다고 해도 울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들키지 않고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위안이었다. 겨울바람이 스칠 때마다 단정하게 채워진 교복 블라우스 속 하얀 목에 빨갛게 생채기를 남겼다. 옷깃을 여밀 생각은 없어 보였다.
머뭇머뭇 멈춰 선 곳은 높은 축대가 끝없이 늘어서 있는 대문 앞. 소녀의 집은 셀 수 없이 많은 백 개의 방이 있다고 해서 인근 지역 내에서 가장 크고 유명했다. 축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떨리는 숨을 내쉴 때마다 심장박동이 점점 크게 느껴졌다.
"뭐 한다고 그래 멍청하게 서 있노?"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커다란 떡을 씹지도 못하고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버지의 얼굴 뒤로 엄마가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여진이 왔나…."
엄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진의 눈을 피해 양손을 뒤로 감추는 찰나 피 묻은 손이 보였다. 마당과 집안에는 깨진 장독과 유리로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과 일꾼들 대여섯이 분주히 부서진 세간살이들을 정리했다. 무거운 공기가 온 집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방마다 창문을 깨부쉈다.
수십 개의 방들을 한두 달에 한 번은 같잖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방에 있는 문짝이나 창문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그때마다 마치 동네 정기 행사처럼 이웃들이나 일꾼들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늘 그랬듯 마당을 가로질러 복도를 들어서는 순간 동네 아주머니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가 이기 몇 번째고? 살림이 남아나질 않겠구먼”
“그기 무슨 상관인교? 3대가 놀고먹어도 남을 만큼 재산도 많다드만. 아지매만 불쌍하지. 아들 잃어버린 것도 서러븐데 맨날 이기 무신 난리고”
“아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아바이가 저 모양이니 돈만 많으면 뭐하노? 으이그 지겨브라”
저번에는 마룻바닥에 굴러다니던 먼지 한 톨이 원인이라 했고 오늘은 손톱깎이가 제자리에 없었다는 게 그 이유라고 했다. 아버지가 볼썽사나운 눈을 부라리며 여진과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집구석 잘 돌아간다. 멍청한 년들이 대를 다 끊어놓더니만 집안까지 말아먹네. 에라이”
그 집구석은 동생을 잃어버린 누이와 아들을 잃어버린 어미가 살고 있는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