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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묘슬 Dec 29. 2024

잃어버린 아이와 백개의 방 #5

[단편소설]

"어르신 계십니까?"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미역을 찰박찰박 비벼 씻던 정희가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현관문을 확인하려는 찰나 방 안에서 여진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나와 문을 열고 말했다.

"왔습니꺼."

현관문 앞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야무진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여진과 정희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새로 오신 요양보호사시군요. 저는 박성식 경위라고 합니다."


정희가 박경위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여진은 손수 커피잔을 꺼내 커피 믹스를 담았다. 떨리는 손과 다리가 불안해 보였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저 사람이구나' 아침마다 기다리던 전화의 주인공임을 여진의 얼굴을 보고 짐작했다.

진한 커피 향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

"식사 준비해 놓았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어르신 내일 봬요."

박경위와 여진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집을 나온 정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후 박경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희가 인사를 했다.


"혹시 어떤 사연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두 사람은 아파트를 나와 한적한 벤치에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았다.

"처음 담당하셨던 팀장님께서 퇴직하시기 전 저에게 부탁하셨던 사건입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다 지났고 가망도 없지만 너무 신신당부하셔서 저도 지금까지 왔고요. 작년까지만 해도 경찰서에 자주 와계셨었는데 아프신 후에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가끔 찾아뵙고 매일 아침 전화로 소식을 알려드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영호 군을 봤다는 공식적인 제보는 20년 전이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는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뜸해진 제보들은 형식적인 절차 이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잊혀진 미제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흥밋거리로 풀어놓는 일부 콘텐츠들만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 너무나 오래된 사건, 오래된 세월이었다. 


"지금도 매일 기다리시는 거네요. 어릴 때 잃어버린 동생분을."

정희는 이제 모든 걸 알 것 같았다. 여진의 쓸쓸한 표정과 한결같은 고집스러움도. 그녀의 삶에서 잃어버린 동생은 평생을 걸고 지켜야 할 약속이었던 것일까. 아직도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져 왔다.

"건강도 나빠지시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만 잊고 사셨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그동안 어르신의 삶을 봐오셨다면 그럴 수 없다는 걸 이해하실 겁니다."

침착하면서도 굳은 표정의 박경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르신 옆에 선생님 같은 좋은 분이 계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어르신 잘 부탁드립니다."


정희는 언젠가 여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제 인생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부모 없이 자란 것도 기가 막히는데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었어요. 우리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아빠가 없고요. 겨우 정신 잡고 몸 추스르는 데 5년이 걸렸어요. 그 사이 시댁에서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통보했어요. 저를 정신병자 취급하면서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진은 말없이 정희의 손을 꼭 잡았다.

"잘못된 게 아이다. 최선을 다 한 거다. 그런 사람이 있제. 행복해지는 꼴을 세상이 용납 못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 맨날 운명에 멱살 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정희는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마치 듣고 싶었던 얘기를 들었으니 이제 볼일 없다는 듯이 연락을 끊었고 그녀는 더욱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확인시켜 주는 존재. 어린 아들의 시선을 통해서 불행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아부어도 멱살 잡혀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

"그래도 살아야지. 어떤 날은 참혹하고 또 어떤 날은 지옥 같아도. 정신 차리고 살아내야 한다. 살다 보면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처럼 이제 웃는 날도 오지 않겠나?"


그 누구보다 외롭고 아픈 삶을 견뎌왔을 여진의 위로가 따뜻한 손으로 전해지자, 정희는 고통스러웠던 삶의 한 자락에서 여진을 만난 것이 운명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정희는 문득 여진의 오른손에 새겨진 뚜렷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수없이 봤을 텐데 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검지 손가락을 관통한 듯한 제법 큰 흉터였다.

"많이 아프셨을 것 같아요."

정희의 목소리에 여진은 긴박하고 팽팽하게 차 있었던 비극의 순간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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