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그 여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행패를 부린 지 서너 달쯤 지난 후였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언젠가부터 줄어들었는데 다시 사업으로 바빠지신 거라 사람들은 말했다. 아버지의 검은색 승용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어느 날부터였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여자가 보기 싫어 매일 집 근처를 한두 시간 배회하다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보고 말았다. 엄마가 밥상을 차려 만삭이 된 그 여자 앞으로 들고 가는 모습을…. 아찔해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버지의 손바닥이 여진의 뺨을 갈긴 후였다. 몸뚱이가 차가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쓰라리고 짜릿한 통증이 몸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건방진 년"
여진이 내던진 밥상과 그릇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김칫국물이 여자의 치마 위로 쏟아졌고 엄마는 손을 덜덜 떨며 허리를 굽히고는 여진의 팔을 잡았다가 이내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커다란 유리 조각이 여진의 손가락을 관통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여진이도 어서 예쁜 손으로 피아노 쳐야지."
여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무대에서 꽃향기가 감돌았다. 끝없이 켜진 조명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고, 여진의 손도 그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객석은 끝에서 끝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번 객석을 둘러본 여진은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이 늘 꿈꾸던 기적 같았다. 몸을 감싸는 새하얀 드레스의 부드러운 촉감, 피아노에 비쳐 찰랑이는 스와로브스키 큐빅 귀걸이, 발에 신겨진 늘 꿈꿔왔던 구두도.
객석 맨 앞에는 엄마와 동생이 손뼉을 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아닌데. 이런 행복은 내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점점 흐릿해지더니 엄마의 손에 꼭 쥔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엄마가 울고 있었다. 동생이 사라졌던 그날처럼.
여진이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팔꿈치까지 동여맨 붕대 때문에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팔 대신에 왼손을 들자, 엄마가 손을 잡았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의 손길을 느낀 순간, 여진은 와락 엄마에게 안겼다. 동생이 사라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엄마의 심장에 밀랍처럼 녹아내려 절대 떨어지지 않는 동생을 느낄 때마다 엄마를 뺏긴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역겨웠지만 엄마와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밥 묵자. 우리 딸. 얼른 나아야지."
엄마가 숟가락을 들어 여진의 입에 밥을 떠넣어 주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엄마랑 밥 먹는 거…."
여진은 목이 메는 걸 참으며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엄마 그거 기억나나? 우리 영호 있잖아. 웃을 때 유난히 한쪽 보조개가 쏙 들어갔었잖아. 그게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나나?"
"오른쪽이었제. 귀엽다고 니가 맨날 손가락으로 누르면 까르르 웃었잖아."
여진은 목구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참고 참았는데 밥을 문 채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차곡차곡 모아온 듯 묵고 묵은 눈물이 온몸에서 솟구쳐 나와 쉴 새 없이 밥그릇 위로 쏟아졌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꺽 꺽 울고 있는 여진의 볼에 엄마의 따뜻한 손이 닿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었다. 엄마와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