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묘슬 Jan 01. 2025

잃어버린 아이와 백개의 방 #8

[단편소설]

전화를 받고 정희가 여진과 함께 도착한 곳은 경찰서 근처의 작은 공원이었다. 잠시 후, 박경위가 60대로 보이는 키가 큰 남성과 그 옆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사 기자라는 사람도 함께 나타났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소개를 주고받는 동안 여진은 염려했던 것보단 다행히 차분해 보였다. 정희는 여진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손을 꼭 잡았다.


"저한테 말씀하셨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박경위의 요청에 남자는 여진과 정희를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본 뒤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제 가족이 이분이 맞습니까? 대단한 부자라고 들었는데…."

박경위가 여진을 대신해 답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이복동생분은 일본에서 거주 중입니다. 이분이 누나분이십니다.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십니까?"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란 대문집에서 누나랑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영호라는 이름도 익숙하게 느껴지고요."


정희가 놀란 눈으로 여진을 바라보았다. 여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꼭 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얼마 전 모친이 사망하면서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사건을 접했다고 했다. 그는 사건 속 실종아동이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태어난 연도와 혈액형이 놀랍도록 일치했다. 

박경위는 약간 들뜬 표정으로 남자와 여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경위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많이 어색하실 겁니다. 오늘은 이쯤 하고 유전자 결과가 나오면 다시 만나시죠.”

박경위가 말이 끝나자, 남자는 실망한 듯 일어나며 혀를 찼다.


"저기…."

그때 망설이던 여진이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남자가 뒤돌아서 여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한 번만 더 자세히 봐도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양손을 들어 양쪽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가락은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곧 여진의 두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마른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됐습니다."

남자가 함께 온 기자와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는 동안, 여진이 박경위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만두지 않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여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번 크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이젠 그만하겠습니다. 그리고 검사 결과는 듣지 않겠습니다."


깜짝 놀란 정희가 바라보았지만, 여진은 고개를 숙이며 박경위에게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처음엔 당황한 듯했던 박경위도 결국 지팡이를 짚고 체념한 듯 돌아서는 여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정한 걸음으로 기우뚱하는 여진을 부축하며 정희가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래도 검사 결과는 확인하시는 게…."

"의미 없다."

여진은 마치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차분히 걸어가는 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희는 몇 차례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을 삼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