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묘슬 Jan 02. 2025

잃어버린 아이와 백개의 방 #9

[단편소설]

며칠 후 연락을 해 온 박경위의 첫마디는 ‘유감입니다’였다.

"모두 다 거짓이었습니다. 입양됐다는 것도 망상으로 보입니다. 아마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데...... 급한 마음에 그만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년 만에 받은 제보 전화가 반가운 것이 무슨 잘못이었을까. 그의 목소리에서 누구보다 자책과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따님과 연락이 닿아서 어르신의 요양원 입소가 다음 주로 확정됐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경위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마지막일지도 모를 전화가 짧게 끊어졌다. 

정희가 여진을 바라보았다. 여진은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순수한 잎사귀들의 향기가 어느덧 봄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여진은 파릇파릇한 봉분 잔디를 쓰다듬으며 정희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작은 봉분이 있는 산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겼고 따로 마련한 외가 선산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선산은 여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엄마는 오랜 세월 심장에 돌덩이를 안고 사셨어.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셨지. 나를 원망하셨을 거야. 내가 동생을 잃어버려서, 엄마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해서…."

풀이 무성한 숲 가운데 고독한 나무처럼 말을 이어가던 여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어르신은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정희는 마치 부러진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여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돌아가시던 날 밤에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르신 같은 딸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으셨을 것에요."

"정말 그랬을까…." 

여진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방이 정말 백 개였나요?"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나중에라도 기억나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정희가 여진의 손을 꼭 잡고는 활짝 웃어 보이자 여진도 함께 미소 지었다. 찬연한 햇살 속 상쾌한 봄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어린 동생이 사라지고 남편이 영영 떠나버렸던 비극적인 순간에도 두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빛으로 찬란했을 태양이었다. 


정희는 처음으로 여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여진의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길었던 세월은 여진에게서 젊음만이 아닌 많은 것을 앗아간 듯했지만, 지금의 미소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마치 혹독한 겨울을 견딘 나뭇가지가 꿋꿋이 새잎을 내밀듯. 겨울이 지나고 그늘이 사라지듯.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정희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발길 닿는 대로"

여진이 고요한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또렷이 대답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