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침 햇살이 창문 틈새로 살짝 비쳐 들어왔다. 희미하게 깨어난 정희는 잠시 누워서 옛 생각에 잠겼다.
여진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여진은 자기 몸집보다 큰 요양원 침대에서 잠자듯 떠났다. 입소한 지 1년 만이었다. 여진의 빈소를 끝까지 지킨 것은 정희였다. 여진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몇몇 다녀가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여진의 곁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더러운 짐승 떼어내듯 정희를 떼어놓고 집을 나갔다. 부모가 이혼한 뒤로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났고, 그 순간조차 어머니는 연락이 없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상실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라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마침내 결혼을 했지만, 예상과 달리 남편은 가정에 무관심했다. 차가운 무관심은 그녀의 마음을 점점 옥죄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버텨야지 하며 애썼지만, 아이가 겨우 돌이 되던 해 남편마저 갑작스럽게 그녀의 곁을 떠났다. 정희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불행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처럼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내 불행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났고 시댁에서는 변호사까지 대동해서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통보해 왔다. 정희는 도망치다시피 멀리 이사를 왔다.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미나 애비중에 한 사람만 제정신 박혀있으면 된다". 그 제정신 박힌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정희는 생각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어린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각오였다. 그 마음은 어떤 힘보다도 강했다. 재정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쉽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큰 위안이 되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조금 편해질 무렵 방문요양일을 시작했다. 노인들을 대하는 일이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과도 일맥상통하는 직업이었다.
여진을 만난 것은 정희에게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정희로 하여금 자꾸 말하고 싶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내가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툭 던지는 여진의 말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르신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항상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면 여진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나중에는 “그래, 내 딸 해줘”라는 말로 답하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누군가의 가족이 된 듯한 생각에 뭉클해졌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왜 밥을 먹는지 알아요?"
빈소를 함께 지켜주던 박경위가 말했다.
"왜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먹는 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 수 있으니까"
"먹고 살아가라는 고인의 뜻이군요"
슬픔에 무너질 것만 같았지만, 정희는 여진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깨달았다. 그녀가 남긴 이야기는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함께 웃었던 시간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부모에게도, 남편에게도 받지 못했던 따뜻함을 여진에게서 배운 것이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만큼은 마침내 그녀가 고단한 삶은 놓을 수 있었길 정희는 간절히 바랐다.
이제 사랑하는 어머니 곁으로 가서 마음껏 품에 안기길. 철없던 소녀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하지 못했던 시절을 보상받기를.
정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지내시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마치 여진이 와서 웃어 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는 살아가고 있다. 아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그리움 속에서, 여진의 따뜻한 손길을 늘 기억하며.
그것이 그녀가 배운 ‘가족’의 또 다른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