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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묘슬 Dec 26. 2024

잃어버린 아이와 백개의 방 #2

[단편소설]

"어르신 저 왔어요. 식사 준비부터 할게요."

정희의 낭랑한 목소리가 좁은 거실을 울렸다. 답은 없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신발을 벗고 주방으로 향했다. 마흔 넘어 자격증을 취득하고 방문요양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게 된 이여진 할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독거노인이었다.


“혼자 지내시니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아요. 부탁 좀 할게요.”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그런 중환자는 자신 없다고 거절했지만,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한 달 정도만 나가달라는 센터장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응해버렸다.


"이혼하고 혼자 지내시다가 3년 전 재혼하셨는데 할아버지마저 얼마 전에 소천하셨어요. 하나뿐인 따님도 이혼할 때 헤어지고 못 보고 살다가 재산 받아 가더니 연락이 끊겼나 봐요. 내색은 하지 말아요."

"요양사들이 자주 바뀐 이유는 뭔가요."

"할머니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하셨어요. 목욕도 거부하시고 약도 안 드시고. 순해 보이셔도 조금 예민해요."

센터장은 작은 목소리로 힘주어 당부하듯 말했다. 


누구나 살아가며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여도 오랜 기간 외로움에 노출되어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그런 자기 모습이 투영된 것일까. 처음에는 할머니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방문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첫날 정희에게 중심 없이 떨리는 손으로 커피 믹스를 타 주던 할머니는 우려와는 다른 작고 평범한 70대 노인이었다.

"할머니 오늘은 얼큰한 김칫국 어때요? 오는 길에 과일 트럭 만나서 귤도 몇 개 사 왔어요. 이따가 까드릴게요."


활달한 정희의 목소리에도 아무 대답이 없던 할머니는 간단한 세수조차 맡기지 않더니 결국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정희는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어르신, 손 좀 잡아드릴게요. 혈액순환에 좋아요."

그 순간 여진은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다음엔 감도 사 올게요. 어르신,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안 그런가요?"


정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여진의 눈길이 잠깐 정희의 손끝에 머무는 것을 정희는 눈치채고 있었다. 정희는 여진의 고집스러움이 밉지 않았다. 사연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삶에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일이 서툰 것이 오히려 트집 잡힐까 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르신 약 드셔야죠."

정희는 약을 정성스레 까서 여진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약은 총 다섯 알이었고 모양도 다양했다. 정희는 한 알 한 알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름과 약효를 설명해 주고 약을 다 삼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여진이었지만 정희는 그럴수록 더욱 그녀의 일상을 야무지게 챙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손발을 마사지하고 부지런히 운동과 산책을 함께 했다. 가족보다 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듯이, 벌어졌던 외로움의 틈으로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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