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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묘슬 Dec 27. 2024

잃어버린 아이와 백개의 방 #3

[단편소설]

여진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매일 걸려 오는 전화 한 통이었다.

그 전화는 아침마다 어김없이 울렸는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여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처음엔 가족인가 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걸려 오는 전화를 기다리는 여진의 모습에는 뭔가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다. 정희는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여진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그 전화가 단순한 일상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희는 오도카니 앉아있는 여진의 어깨 위로 살며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제 우리 아들이랑 만든 양갱인데 어르신 생각이 나서 가져와 봤어요. 한번 맛보시겠어요?"

정희는 허리를 굽힌 채 여진의 눈앞에 못생긴 양갱 두 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정희가 일부러 아이와 함께 만들면서 여진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평소 같으면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을 여진이 오늘은 양갱을 유심히 보더니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옳지! 정희는 마치 아기가 처음 이유식을 받아먹는 걸 본 마냥 기쁨에 차 외쳤다.


"어때요? 모양은 그래도 맛은 있죠?"

여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정희는 자신이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뭐 맛있는 거 해 먹을까요? 가지볶음? 순두부찌개?"

정희가 신나서 부엌으로 걸어가는 동안 여진은 양갱을 두 개째 입 안에 넣고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애기가 있다고?"

"네. 어르신 7살이에요. 사진 보여드릴까요?"

여진의 반응에 감격한 정희가 뛸 듯이 기뻐하며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첩에 가득 찬 아이의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기억이라는 건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왜곡되는 것이라 했던가. 하지만 여진의 기억은 잠을 청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꿈에서 마저 또렷했다. 꿈은 비슷한 패턴으로 여진을 괴롭혔다. 

핑크 메리제인 구두에 레이스 달린 양말. 황토색 레깅스에 청색 멜빵 치마를 입고 딴딴따 박자에 맞춰 걷다가 고개를 들면 파란 대문이 보였다. 문을 열면 동생을 업고 마당을 쓸던 엄마가 웃는 얼굴로 ‘우리 딸 왔나. 아가 좀 봐주라’하며 포대기에 감싸인 동생을 내밀었다. 


포대기를 받아 안으면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포대기를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 동생을 찾으려 방문을 열고 또 열었다. 백 개의 방문은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면 어두운 방구석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 모습은 꿈속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그림자처럼 고통이 되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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