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Aug 15. 2018

책 쓰러 간 휴가에서 책은 안 쓰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우아하게 글쓰기'라는 환상

강원도로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휴가의 테마는 책 만들기.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이런저런 생활인의 일을 하느라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는 책 쓰기 작업을 진전시켜 놓는 것이 목표였다. 


커피의 고장 강릉은 책 쓰기 작업을 하기에 완벽한 곳일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우아하게 노트북 자판을 타닥거리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힘차게 강원도로 출발했다.


바다는 햇살 아래 반짝반짝거리고 늦여름의 초록은 눈부셨다. 산해진미로 위장을 풍요롭게 한 후 바다가 보이는 멋진 카페를 찾았다. 노트북과 인디자인 책을 펴 놓고, '시장조사차' 사 온 신작 에세이들을 같이 올려놓고, 작업을 시작하려다......


요조, <오늘도, 무사>


'시장조사차' 에세이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매력 없는 사람이 열심히 쓴 에세이보다 멋진 사람이 대충 쓴 에세이가 더 재밌다였나, 소설은 열심히 노력하면 잘 쓸 수도 있지만 에세이는 일단 작가 자체가 멋진 사람이어야 한다였나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오늘 데려온 책의 작가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생야채처럼 아삭아삭 살아있는 글맛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니 몇 시간이 훌렁 지나가 버렸다. 배가 고파왔다.


열심히 주변 맛집을 서치한 후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밥을 먹으러 갔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이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이텐션 상태가 되었다. 배부르고 흡족한 상태로 식당을 나와 희고 고운 모래가 있는 해변을 찾았다. 샌들을 벗었다. 바다가 먹다 버린 조개껍질에 찔리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백사장을 걸었다.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밀키스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노트북을 폈다. 잠깐, 아까 그 작가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 보자. 이렇게 또 한 시간이 훌러덩 지나간다. 심기일전을 위해 넷플릭스 하나만 보고 시작하자고 나의 다른 자아와 합의를 봤다. 미드 <제인 더 버진>을 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할머니 밑에서 가톨릭으로 자라며 혼전순결을 맹세한 제인은 병원에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의사 실수로 인공수정을 당한다. 혼전순결인데 임신을 하게 된 제인은 앞으로 될 것인가? 이 막장스러운 설정에 2화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3화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내 휴가는 끝났다.


내 휴가를 가져간  미드 <제인더버진>


오는 길에 속초에 들러 전부터 가고 싶었던 동아서점을 방문했다.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3대째 운영하고 있는 멋진 서점. 정성스러운 큐레이션에 넋을 놓고 책을 탐독했다. 세상엔 좋은 책이 정말 많다.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서점은 지갑을 열게 한다. 책을 한아름 사서 나왔다.




세상엔 정말 재미있는 게 많다.

좋은 읽을거리도 많다.

거기에 굳이 내 책을 더해야 할까?

그냥 독자로서 소비자로서 즐거우면 되지 굳이 작가나 창작가가 되어야 할까?


 ... 라며 아직도 모니터 앞에서 딴짓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독립출판이라는 딴짓 최고봉을 만났는데 세상엔 다른 재밌는 딴짓이 너무나 많다. 나는 아직도 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남이 정성껏 만들어놓은 세계를 감상하는 게 더 즐거운 것 같다. 이 광활하고 즐거운 세계를 외면하고 본인의 노트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을 존경한다.




표지: Photo by Igor Starkov on Unsplash


이전 03화 어서와 인디자인은 처음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