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수박 주스)
수박 한 통을 선물 받았다.
혼자 사는데
소분해서 먹으면 금방 상할 것 같았다.
믹서에 갈아
수박 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이왕 먹을거면
씨와 껍질까지 건강하게.
수박을 통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수박을 잘게 자르고 믹서에 넣고 갈고,
깔대기를 이용해 페트병에 넣고,
도마에 흐르는 수박물을 닦고,
자르고 넣고 갈고 넣고 닦고를
수십 번 반복했다.
껍질과 함께 갈아서 색이 좀 탁하지만
맛은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주스'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갈았음에도 씨와 껍질로 인해
건더기가 너무 많아 꿀떡꿀떡 넘어가지 않았다.
믹서기와 착즙기가 엄연히 다르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건더기가 없는 주스를 먹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큰 컵을 준비하고,
위에 체를 올리고,
내용물을 조금 붓고,
숟가락으로 펴면서 누르고,
수분이 빠진 건더기는 버리고,
올리고 붓고 펴고 누르고 버리고를
수십 번 반복했다.
비로소 만족할 만한 목넘김의
수박 주스가 완성됐다.
한 모금 먹고 아주 만족하며 방심한 찰나
싱크대에 아슬하게 걸쳐놨던 컵이 넘어지며
액체가 쏟아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히
그간의 개고생을 상기하며
분노와 자기 혐오에 휩싸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서 오히려 놀랐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멋쩍게 허허 웃고
그냥 치우기 시작했다.
행주를 거의 열 번 빨아야 할 만큼
많은 양을 쏟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화가 나지는 않았다.
수박 주스가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한 컵을 쏟았을 뿐이었다.
냉장고 뒤에 쏟지 않아
벽지가 젖거나 장판을 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여전히 냉장고엔
충분히 많은 수박 주스들이 든든하게 들어있었다.
게다가
다 치우고 먹는 수박 주스는 여전히 맛있었다.
괜히 주스 만든다고 난리를 쳤다고 자책하며
그냥 곱게 잘라서 먹을걸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로 보지 않으면
상황은 상황일 뿐이었다.
수박 주스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결과물은 뿌듯했다.
사서 고생하는 이 약간의 해프닝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살짝 느껴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