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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15화

늦잠에 대한 변명

혹은 작은 반항

by 조융한삶



알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얼른 끄고 다시 꿈나라로 침몰했다. 목표했던 시간보다 한 시간을 늦게 일어났는데도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어제 신었던 구두가 발가락 사이사이에 남긴 압박감 때문인지, 아니면 렘수면의 한복판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뇌의 저항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물음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굳이, 일찍 일어나야 하는가.


처음에는 세상이 미리 준비해둔 모범답안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착한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까. 남들은 이미 출근해서 일을 할 시간이니까. 해가 중천에 떴고 남들은 다 열심히 사니까. 이 얼마나 무력한 동어반복인가. 이 모든 답들이 타인을 준거점으로 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기관 없는 몸'처럼, 나에게는 '타인 없는 윤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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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내재적인 이유들을 탐문해보았다. 시간은 소중하니까, 낭비하면 안 되니까. 그러나 시간의 소중함이라는 것도 결국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가. 공부든 독서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니까. 여기서 '생산적'이라는 형용사가 품고 있는 자본주의적 함의를 간과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니까. 이 문장은 언뜻 숭고해 보이지만, 결국 죽음을 도구화하여 삶을 억압하는 논리가 아닌가.


반항심이 꿈틀거렸다. 왜 시간은 낭비하면 안 되지? 그러면 나는 어제 죽은 이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가? 모든 답이 사회적 관습, 타인의 기준, 통념에 기댄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라 답을 회피하는 방법들이었다. 라캉이 말한 '상징계'의 명령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주입받은 무의식의 검열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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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올랐다. 현대사회는 유형의 계급과 외부의 착취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형의 계급과 보이지 않는 착취자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더 교묘하고, 더 전면적이고, 더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대인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새로운 착취자는 과거처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 둥지를 틀고 앉아, 24시간 내내 끝없이 스스로를 감시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시스템인가. 간수와 죄수가 하나가 된 상태에서 탈옥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 감시에 할당량도 없고, 만족도 없고, 퇴근도 없다는 것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하나된 상태, 이 착취에는 끝이 없다. 우리는 모두 내면에 판옵티콘을 갖고 살아간다. 미셸 푸코의 그 개념이, 이제 우리 내면에 완벽하게 내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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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나는 나의 늦잠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이 불안의 원인은 내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주입한 불안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열심히 합리화를 하며, '그렇다면 내면의 착취자에게 반항하기 위해서 오늘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누워 있겠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허리가 아파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사유를 배신한 순간이었다.

거대한 담론과 소소한 일상 사이의 간극에서, 숭고한 사유와 비루한 몸짓 사이의 틈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고 또 배신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해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이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세계에 대한.


늦잠을 자는 나 자신을, 그 늦잠에 죄책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그리고 그 죄책감마저 이론으로 포장하려 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판옵티콘을 무력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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