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수박 주스)
수박 한 통을 선물 받았다. 혼자 사는 집에서 수박 한 통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다.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고, 선택이 요구된다. 나는 믹서기를 선택했고, 수박 주스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다.
씨와 껍질까지 함께 갈겠다는 결심. 버려지는 것 없이 모든 것을 활용하려는 의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 상상을 비웃는다. 자르고 넣고 갈고 넣고 닦는 일련의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하는 동안, 나는 내가 상상했던 '주스'와 현실의 '수박 음료' 사이의 거리를 체감했다.
믹서기와 착즙기가 다르다는 깨달음. 이것은 단순한 기계적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가진 도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체를 이용한 2차 가공, 올리고 붓고 펴고 누르고 버리는 또 다른 반복의 의식을 통해 마침내 '만족할 만한 목넘김'을 얻어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전복이 일어났다. 병이 넘어지고 액체가 쏟아졌다. 완성의 순간에 찾아온 허탈한 사고.
-
하지만 여기서 내 이야기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노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증언한다.
분노와 자기혐오, 그 익숙한 정서의 패턴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순간 나는 어떤 내적 변화를 목격했다. 화내지 않는 마음, 개의치 않는 태도.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수용이었다.
문제로 보지 않으면 상황은 상황일 뿐이었다. 이 문장이 내 깨달음의 핵심이었다. 해석의 전환, 관점의 이동이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명제.
수박 주스를 만드는 과정이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결과물은 뿌듯했다는 역설. 사서 고생하는 해프닝에서 마음의 평화를 발견했다는 고백.
냉장고에는 여전히 충분한 양의 수박 주스가 들어있었다. 중요한 것은 쏟아진 주스가 아니라 남아있는 주스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었다.
-
우리는 모두 각자의 수박 주스를 만들며 살아간다. 예기치 못한 사고 앞에서 분노할 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다. 어쩌면 성숙이란, 동일한 현실 앞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쏟아진 수박 주스는 다시 담을 수 없지만, 그 순간 내가 발견한 평정의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