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지
화를 내본 지 꽤 오래 되었다. 일단 화날 일이 없고, 딱히 화낼 것도 없다. 만약 화가 나더라도 금방 풀려버린다. 이미 일어난 상황에 대해 푸념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성격이 유순해진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시선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다른 해석이 나오고,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다른 반응이 나온다. 마음의 문법이 바뀌었다.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좋아", "아님 말고"라는 세 개의 주문은 완전한 마음의 평온을 향한 수행적 언어이다. 이는 불교의 무아 사상이나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와도 통한다. 하지만 여기서 추구하는 평온은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계와의 더 깊은 화해이다. 웃지 않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도 일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강인함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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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세계에 산다. 국가나 도시가 아니라 각자의 내적 세계 속에. 따라서 같은 상황에서도 각자의 경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같은 강아지를 보고서 누구는 귀여워하고 누구는 무서워하는 것처럼.
이는 단순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세계에서 그 사람은 옳다는 것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윤리적 응답을 의미한다. 내 세계의 기준으로 타인의 세계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인식은, 모든 폭력의 근원적 중단을 암시한다.
자기가 사는 세계는 자기가 만들어갈 수 있다. 상황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반응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반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명제는 실존주의적 불안보다는 오히려 평온에 가깝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종류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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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평온한 성찰에는 정직한 균열이 있다. 내게 당연한 기준, 기본, 상식적인 것들이 타인에게는 당연한 기준, 기본, 상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이 공동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규범, 규칙이라는 선이 있지만, 그 선 또한 각자의 세계 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고백은 어쩌면 이 시대 가장 급진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분노와 혐오가 일상화된 시대에 평온을 꿈꾸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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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사랑은 세계의 완벽함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세계의 불완전함마저 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움 말이다.
결국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더 부드럽고 유연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작은 주문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자의 사정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 담겨 있다. 그 겸손함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일 것이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마음의 평온에 대한 소망은 개인적 안녕을 넘어선다. 그것은 타자와 세계에 대한 더 너그러운 이해, 더 깊은 연민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화를 내지 않게 된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더 정확하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