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단상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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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있는가

한 여름밤의 꿈

by 조융한삶 Feb 28. 2025



밤 열한 시 반

흐리고 비 오는 퇴근길이었다.



집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새끼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조심조심 주변을 탐색하며 걷는데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집앞 교회도 아니고,

짚옆 철물점도 아니고,



소리는 아파트 담벼락 바깥에 주차된

흰색 k3 밑에서 들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차 밑을 비춰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새끼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꽤나 처량했다.

도도하고 기품 있는 일반적인 고양이 소리가 아니라



얼마나 굶은 건지,

얼마나 추운 건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듣자마자 알 수 있는



절박하고 투박한

당장이라도 구조를 바라는

위급한 구조 요청 신호였다.



만약 구조에 성공한다면

이건 간택인가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벌써

고양이 사료와 모래를 주문하고,

캣타워, 츄르, 스크래처까지 모두 구입했다.

내일은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예방접종을 해야지.



하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흰색 k3 밑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리 빛을 비춰 찾아봐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습하고 찝찝하고 피곤했지만



이미 알게 된 이상

어린 생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겨울철 고양이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는다.



막 시동이 꺼진 자동차의 엔진룸은

도시의 고양이에게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운전자들이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면



빠르게 탈출하지 못한 고양이들은



엔진의 뜨거운 열을 이기지 못하고

털과 살이 녹으며 엔진에 엉겨붙어 그대로 죽는다.



이는 자동차 고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뉴스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경비 아저씨께 말씀드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래도 일단 말씀드리자.

경비 아저씨는 엄청난 밝기의 랜턴을 들고 나오셨다.



아저씨도 고양이 울음 소리를 듣고

열심히 차 밑을 비춰보셨다.



그러나 아무리 밝은 랜턴으로 차 밑을 살펴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근처에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했던 고양이 통조림 두 개.



친절하게 뚜껑까지 열려 있었지만

두 개 모두 아예 입도 대지 않은 새것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분명히 이 고양이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차에서 소리가 나지만

보이지 않는다면



차 밑부분이 아니라

차의 내부에 고양이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내부는

안락한 조수석 시트가 아니라

아마도 보닛이나 엔진룸일 것이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가도 '야옹아' 부르면 힘을 내서 소리를 짜냈다.



도대체 몇 시간을 춥고 배고프게 갇혀 있었을까.

이 어린것은 점점 탈진해가는 모양이었다.



경비 아저씨는 차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k3 앞유리 전화번호 옆에는 장애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사실 차주가 오더라도

고양이를 꺼낼 뾰족한 방법은 없겠지만



적어도 트렁크나 보닛을

열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통화를 마치고 차주를 기다리는데

전기 자전거 한 대가 근처에 멈춰 섰다.






우비를 입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아직도 있어요?" 라는 어눌한 발음.



아마 한국인이 아닌 듯한 여성은

몇 시간 전에 이곳에 고양이 통조림을 열어두고 갔다고 했다.



그때가 몇 시냐고 물어보자

아홉 시쯤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최소한 두세 시간은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곧 차 주인이 등장했다.



꽤 사나운 인상과 신경질적인 말투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연륜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나는 '고양이의 구조가 쉽지 않겠구나.'

직감했던 것 같다.



아파트 입구가 아니라

아파트 옆 철물점 건물에서 나오는 차 주인을 보며



경비 아저씨는 입주민도 아니면서 여기에 차를 댔다고 혼잣말로 구시렁댔지만

차 주인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나, 경비 아저씨, 젊은 여성)는 차 주인에게

늦은밤 전화한 사정을 설명하고



고양이가 차 내부에 갇힌 것 같으니

보닛과 트렁크를 열어보자고 했다.



약간의 청각 장애가 있는 듯한 차 주인은

이 밤에 뭐하자는 거냐며 짜증을 냈다.



솔직히 그 짜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혹시 고양이가 엔진룸 안에 갇혔는데

만약 그 상태로 시동을 걸어 운전하면 안에서 죽을 수도 있고,

그 시체를 처리하는 데 꽤나 번거로운 비용이 들 수도 있다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차 주인은 보닛 여는 방법을 몰랐고

트렁크와 좌석를 확인했으나

고양이는 없었다.



차 주인은 수면을 방해받은 것을 매우 언짢해 하며,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상황 앞에서 연신 답답해하는 한숨을 뱉었다.






결국 119에 전화를 걸었다.

습하고 찐득거리고 잔뜩 모기 물려 찝찝한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매우 성가신 것을 대하는 말투로



차에 들어간 고양이를 구하는 것은 본인들의 업무가 아니고,

차를 들 수 있는 장비도 없으며,



날이 밝으면

공업소에 가서 말해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야속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으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비도 오고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에

소방차 또는 거대한 장비를 불러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은



인도적이긴 해도

현실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모두가 좌절해서

막연하게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



차 주인은 차에 앉더니

시동을 걸었다.



우리는 다들 놀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움직여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극적 갈등 해소.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양이를 구조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우나

나름 최선을 다했고 내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집에 들어가

습한 땀을 씻어내고,

뽀송하게 머리를 말리고,

가려운 곳에 모기약을 바르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침대에 누워 피로를 녹여낼 수 있겠다는 해방감.



고양이가 타 죽는 것만은 막고 싶었는데,

결국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차 주인을 원망해야 할까,

이 상황을 끝내줘서 감사해야 할까.



나와 경비 아저씨와 외국인 여성은

갑작스런 전개에 당황한듯 서로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고양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k3는 멀리멀리 사라졌는데

그 처량한 울음소리는 차가 있던 자리 근처에서 다시 들려왔다.



담벼락.



k3는 아파트 담벼락 바깥쪽에 세워져 있었고.

소리는 담벼락 안쪽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벙벙 하면서도



고양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다행감과 설렘을 안고 담벼락 안쪽으로 향했다.



두 개의 통조림도 잊지 않고 챙겼다.






안쪽에는

아파트 주차장과 쓰레기 분리수거장이 있었다.



차에서 가장 가까운 담벼락에 다다랐으나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고 소리는 약간 멀어져 있었다.



들리는 쪽으로 다시 몇 걸음 다가갔지만,

고양이 소리는 다시금 몇 발자국 멀어졌다.



마치 제논의 역설 속 거북이처럼

소리가 멀어진 만큼 다가가고 그만큼 소리의 멀어짐이 반복됐다.



그렇게 막다른 담벼락이 나올 때까지 다가갔지만



고양이 소리는 어느새 또 다른 담벼락을 넘어

아파트 옆 철물점 창고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양이 통조림을 담벼락 근처에 두고

각자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고양이는 어떻게 생겼었을까.

울음 소리는 분명히 새끼가 맞았는데,



그래도 어딜 다치거나 갇힌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고양이는 애초에

구조가 필요한 게 아니었나보다.






비 오는 날 밤, 고양이, 경비 아저씨, 외국인 여성, 인상이 험한 차 주인,



집에 돌아와 씻고

맥주를 한 캔 하면서 생각하니

마치 하나의 단편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고양이에게 홀린 걸까.






감각은 역시나 믿을 수 없고,

기억은 너무나 조악하다.

추리는 언제나 빗나가며,

확신은 결국 불확실하다.



메멘토,

셔터 아일랜드,

유주얼 서스펙트,

프라이멀 피어,



등의 스릴러 영화가 생각나는 밤.



이 이야기를 태주와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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