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잠들지 못하던 여러 새벽들을 기억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우던 밤들. 아무리 책을 읽어도 공허했다. 아침은 견뎌내야 할 시간이었다. 매일 밤마다 하나의 질문이 내 목을 졸랐다. 어차피 죽을 텐데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물론 답은 없었다.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던져온 질문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한 편의 영화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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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은 세탁소 사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우주가 그녀 앞에 펼쳐진다. 록스타 에블린, 배우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 무한한 가능성들이 동시에 실재한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에블린은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앞에 선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모든 가능성들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조이가 만든 베이글은 그 답을 보여준다. 검은 구멍.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의미도, 사랑도, 희망도. 베이글은 무(無)의 완성체다.
베이글의 형태는 의미심장하다. 가운데가 뚫린 원. 있음 속의 없음, 존재 속의 무. 이것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베이글은 굽는 과정에서 그 구멍이 생긴다. 반죽이 팽창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빈 공간. 즉, 무는 존재의 결과물이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공허함. 실존의 구조를 그대로 담고 있는 형태.
조이는 이 베이글이라는 허무주의 속으로 모든 것을 집어넣는다. 온 우주의 모든 것들.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베이글은 블랙홀이 된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게 된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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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블랙홀 앞에서 에블린은 다른 것을 떠올린다. 무한한 우주의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이 매일 서 있던 그 좁은 공간을. 세탁소.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곳이면서, 동시에 옷을 상하게 만들기도 하는 곳. 정화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 에블린이 무수한 다른 삶을 경험한 후 돌아오는 곳.
에블린에게 세탁소는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다. 시간이 축적된 공간이다. 남편과의 갈등도, 딸과의 어긋남도, 그 모든 이야기가 쌓인 곳. 그리고 세무서에서 정리하는 영수증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다. 커피 한 잔, 주차비, 세제값. 그러나 모이면 하나의 삶이 된다.
더러워지고 깨끗해지기를 반복하는 옷들과, 소비되고 기록되기를 반복하는 일상들. 그 반복 속에서 시간이 쌓이고, 삶이 두터워진다. 에블린은 이제 안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곳을 선택한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적극적 긍정이다. 내가 가진 것이 객관적으로 최고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최고라고 여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어디서 내려졌을까. 영화의 마지막, 에블린과 조이는 텅 빈 우주의 바위 위에 앉는다. 베이글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후 남은 원시적인 돌덩어리. 돌은 변하지 않는 것, 가장 단순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의미 없는 존재, 이유 없는 지속의 상징.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기다린다. 모든 가능성이 소진된 후, 남는 것은 결국 관계 그 자체다. 그런데 이 돌 위의 대화에서 무엇이 오고갔을까. 거창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아마도 가장 단순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힘들었지?" "그래도 여기 있네." "응, 여기 있어." 그 정도의 말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단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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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블린이 발견한 것은 더 단순했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끝에서, 존재의 부조리 앞에서 그녀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웃는 것. 이 웃음은 냉소가 아니다. 존재의 터무니없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력 있는 웃음이다. 베이글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려 할 때, 에블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앞에서 웃는 것이었다. 무의 압도적 힘 앞에서도 웃을 수 있다면, 그 웃음이야말로 무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웃음에는 거리 두기의 힘이 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비극이 되고, 너무 멀리 서면 무관심이 된다.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볼 때 희극이 된다. 에블린이 발견한 것은 이 적절한 거리감이다.
둘째, 우기는 것. 내가 가진 것이 최고라고, 비록 객관적 근거는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라고 우기는 것. 이 '우기기'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태도에 가깝다. 합리적 이유 없이, 그러나 확고하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 어쩌면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웃음과 우기기.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삶은 비로소 견딜 만한 것을 넘어서 즐길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것을 하나의 형태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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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눈깔. 구글 아이즈.
베이글이 검은 바탕에 뚫린 구멍이라면, 구글 아이즈는 흰 바탕에 찍힌 점이다. 정확한 대칭. 베이글이 중심의 공백이라면, 인형 눈은 중심의 충만이다. 하나는 빨아들이는 블랙홀, 다른 하나는 바라보는 시선. 베이글이 모든 것을 무(無)로 환원한다면, 구글 아이즈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조이가 베이글로 세상을 삼키려 할 때, 에블린은 구글 아이즈를 선택한다. 무의 구멍이 아니라 유의 점을. 공백이 아니라 충만을.
핫도그 손가락으로 소통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우스꽝스럽지만 진심이었다. 구글 아이즈도 그렇다. 가짜 눈이지만 진짜 시선을 만든다. 베이글이 존재를 지우는 형태라면, 구글 아이즈는 존재를 만드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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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에블린은 돌아온다. 세탁소로. 그녀는 베이글의 허무를 보았다. 모든 가능성이 결국 무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구글 아이즈의 역설도 발견했다. 검은 구멍 대신 흰 바탕을 선택하는 것, 공백 대신 점을 찍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계는 달라진다.
베이글은 여전히 거기 있고, 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편에 구글 아이즈를 놓을 수 있다. 검은 구멍에 흰 바탕을, 중심의 공백에 중심의 점을, 허무의 형태에 존재의 형태를.
나도 이제는 안다. 삶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허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 공백을 인정하면서도 충만을 선택할 수 있다. 베이글과 구글 아이즈 사이 어딘가에서.
그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