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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22화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삶의 의미, 부조리, 반대신론의 철학

by 조융한삶




코끼리는 죽음을 앞두고 무리를 떠난다. 여우는 숨을 곳을 찾아 홀로 사라진다. 개는 주인의 품에서 마지막 눈을 감는다. 동물들에게도 죽음의 예감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처럼 매일을 죽음과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다. 죽음이 현실이 되는 그 순간까지, 그들은 그저 살아간다.


인간만이 가진 이 기이한 능력.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순간을 진지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살아내는 이 역설. 여기서 인간의 근원적 부조리가 시작된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 어딘가를 떠도는 먼지 한 톨에 불과하다. 신이 아니라 기껏해야 백 년을 버티다 소멸하는 유기체다.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연히 원숭이보다 조금 나은 존재다. 삶의 주인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맹목적 정보의 운반책이다. 의식의 지배자가 아니라 무의식과 본능에 끌려다니는 꼭두각시다.


이 모든 사실들이 인간을 우주적으로 초라하게 만들고, 삶을 무의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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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이 우주보다 거대했다면, 영생불멸했다면, 만물을 창조할 수 있었다면, 유전자를 초월했다면, 삶의 완전한 주인이었다면, 의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때 인간의 삶은 의미로워지고 가치로워질까.


인간의 시공간적 왜소함도, 우주 중심에서 쫓겨난 지구의 변방성도, 신을 닮지 않은 인간의 불완전함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부조리는 다른 곳에서 온다.


그렇다면 부조리는 정확히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조리는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열망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충돌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왜'라고 묻지만, 세상은 답하지 않는다. 삶에 근본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지만, 우주는 그 믿음을 배반한다.


이 간극, 이 어긋남이야말로 부조리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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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카뮈는 말한다. 자살하지도, 절망하지도, 도피하지도 말고 그저 살아가라고. 시지프스처럼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라고. 부조리를 인정하되 굴복하지 말고, 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되 삶을 포기하지는 말라고.


네이선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답한다. 절대적 의미의 부재가 곧 모든 의미의 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우주적 차원에서 무의미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는 충분히 의미로울 수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침, 좋아하는 책을 읽는 오후,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풍경.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거대한 무의미를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질문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부조리를 껴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을 아는 것이 인간의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앎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자체가, 어쩌면 부조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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