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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24화

한밤의 까마귀

죽음의 소멸

by 조융한삶




게놈 해독이 완성된 지 이십 년이 흘렀다. 당시 삼십 억 달러가 필요했던 작업이 이제는 오백 달러면 충분하다.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나는 이 압축된 시간과 비용을 응시한다. 무한한 페이지를 품은 보르헤스의 기이한 서책처럼, 기술은 이제 무한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음 목표로 뇌를 지목했다. 브레인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의식을 해독하고, 물리적 형태를 벗어난 순수 에너지 상태로 우주를 항해하는 미래를 그려낸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순간 이동, 달까지 일 초, 화성까지 삼 분. 모든 인간이 우주의 히치하이커가 되는 시대를 예언한다.


그러나 나는 의문한다. 정말 그런 미래가 도래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온다면, 우리는 무엇을 상실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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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포착한 부조리는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근본적 모순에서 발원했다. 죽음은 한밤의 까마귀처럼 보이지 않으나 항상 우리 곁에 서성였고, 그 어둠이 있었기에 삶이 찬란할 수 있었다.


만약 죽음이 소거된다면? 불멸이 현실화된다면? 그때의 부조리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아마도 무한한 시간을 소유한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역설이 될 것이다. 유한함이 창조하던 절박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한함이 생산하는 권태가 자리 잡을 것이다. 불멸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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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가 무한한 재산과 건강, 시간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때의 진정한 사치는 무엇이 될까. 어쩌면 그 시대의 사치는 역설적으로 유한함일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 무한한 시간을 가진 존재들에게 가장 값진 것은 시간의 제약일 수도 있다.


혹은 망각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축적하는 디지털 의식에게 잊는다는 행위만큼 소중한 선물이 또 있을까.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는 존재는 사유할 수 없다. 사고하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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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질문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배우면서도 스스로 사유하고 깨달아야 하는 불완전한 인간. 그러나 질문야말로 인간의 가장 숭고한 능력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 집의 창문이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미지의 영역을 엿보고, 타자와 조우하며, 자신을 성찰한다. 기술이 모든 해답을 제공하는 시대가 와도, 질문하는 능력만큼은 결코 대체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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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약속하는 무한한 미래가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 이 찰나의 소중함이다. 한밤의 까마귀가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 해도, 그 까마귀 때문에 가능했던 이 모든 아름다움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불멸일지도 모른다. 기술적 불멸이 아닌, 기억과 사랑을 통한 불멸.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진다. 동시에 한 사람이 사랑하면 하나의 우주가 영원해진다.


나는 오늘도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또 다른 선물을 발견한다. 기술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일 것이다. 그 질문들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고, 이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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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om/shorts/wuLlqi4kX_I?si=3s1bdIyGvWf-zgF4



한밤의 까마귀

주머니 속 유리그릇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스승의 유언

무문석과 화문석

갈릴레이의 혼잣말


법계 - 노모스

자연계 - 피지스

기호계 - 세미오시스


생명자본 - 피, 언어, 돈


인지 – 진위 – 순수이성비판

행위 – 선악 – 실천이성비판

판단 – 미추 – 판단이성비판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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