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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20화

이름의 형이상학

나 그리고 나 그리고 나

by 조융한삶




2008년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안산 중학교의 '김재경' 영어 선생님은 '공재경'이라는 학생을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유독 예뻐하셨더랬다. 이 평범한 일화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다. 이름이라는 기호가 발휘하는 은밀하고도 강력한 자기장 같은 것 말이다.


학교라는 작은 우주에서 이지은과 박지은이, 최민지와 김민지가, 조민호와 권민호가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왔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의 음성학적 동질성이 만들어내는 친밀감의 화학작용. 그것은 언어학을 넘어선 존재론적 현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Lawrence'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 변호사(Lawyer)가 유독 많고, 'Denni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 치과의사(Dentist)가 많다는 통계적 사실이다. 이름이 운명을 부르는가, 운명이 이름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는 우리가 아직 해명하지 못한 어떤 비밀스러운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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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뿐만이 아니다. 직업이든 직책이든, 심지어 발음이 달라도 그 의미만 같으면 우리는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농부와 미국의 farmer, 우리나라의 배우와 미국의 actor 사이에 흐르는 은밀한 연대감.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직업적 정체성의 자장. 이것은 혈연과 학연을 포함한 내집단 편향이라는, 인류사를 관통해온 뿌리 깊은 본능의 또 다른 발현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극단적 사고실험을 시도해보자.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의 이름이 똑같다면 어떨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스페인의 세비야까지, 잠비아의 사바나에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마을까지, 전 세계 80억 인구의 이름이 전부 '조융'이라면..?


엄마도 조융, 아빠도 조융, 할머니도 조융, 할아버지도 조융. 옆집 친구도 조융, 친구 아빠도 조융, 아빠 친구도 조융. 학교 선생님도 조융, 의사 선생님도 조융, 택배 아저씨도 조융. 여자친구도 조융, 국민 엠씨도 조융, 국민 여동생도 조융. 심지어 아프리카의 세 살배기도 조융, 소말리아의 해적도 조융. 조융, 조융, 조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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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한 상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서로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될까?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가족을 대하듯 이웃을 대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미소를 건네게 될까? 아니면 오히려 이름의 차별적 기능이 사라짐으로써 더 큰 혼돈과 소외가 찾아올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야 한다. 이름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그리고 차이와 동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해야 한다. 이름은 단순히 개별자를 구분하는 기호가 아니라, 존재의 고유성을 보장하는 근본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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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미 세상 사람들의 이름은 전부 똑같다. 지역마다 발음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정확히 같은 이름이 하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부르는 그 이름.


'나'


한국어로는 '나', 영어로는 'I', 프랑스어로는 'je', 독일어로는 'ich', 중국어로는 '我', 일본어로는 '私'. 발음은 제각각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인간이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이름.


이 존재적 일치의 발견 앞에서 순간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철학적 현기증을. 우리는 이미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누구도 차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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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아닐까? 이 질문 앞에서 모든 사유는 잠시 정지한다.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갖는 존재론적 함의를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학적 범주를 넘어선다. 그것은 의식 자체의, 주체성 자체의, 존재 자체의 가장 원초적 표현이다.


모든 인간이 '나'라고 말할 때, 그들은 동일한 존재론적 위치에서 동일한 실존적 체험을 언어화하고 있다. 의식의 중심점에서, 세계와 마주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존재의 가장 내밀한 핵심에서 발화되는 그 하나의 말.


물론 각각의 '나'는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나'는 '나'라는 보편적 구조 안에서 하나로 수렴한다. 마치 수많은 파도가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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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보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은 그저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도, 심지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그 사람도 결국은 나와 같은 '나'이다.


이것은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심층 구조가 드러내는 존재의 근본적 일치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


'나'라는 이름을.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필연적으로 모든 '나'에게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나'는 결국 하나의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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