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존재 사이의 미니멀리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물건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물건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책상 위의 공책들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나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해물이 되고, 옷걸이의 옷들은 나를 꾸미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압박하는 무게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정리정돈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에 관한 문제다.
물건들의 반란은 조용히 시작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냉장고 속 락앤락통들이 늘어나고, 서랍 속 쓰지 않는 그릇들이 쌓여간다. 그리고 어느 날, 물건들에게 온통 포위당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보르헤스의 도서관처럼, 방은 무한히 확장되는 소유물들의 미로가 되어버렸다.
-
물리적 공간을 넘어 디지털 공간마저 같은 혼돈에 빠져있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정리되지 않은 폴더들, 어디에 저장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파일들, 핸드폰 속 사용하지 않는 애플리케이션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아우라를 잃듯이,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정신적 아우라'를 잃어가고 있다. 무수한 데이터와 정보, 그리고 소프트웨어들이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시키고,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온전한 경험은 훨씬 더 적어진다.
-
게다가 미니멀리즘을 원한다면서 아까워 버리지도 못한다. 간소함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풍요로움을 포기하기는 두렵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불안의 표현이다.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가능성의 포기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쓸지도 모를 물건을 버리는 것은 미래의 어떤 버전의 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혹시 몰라서"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것들을 보존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모든 가능성들이 현재의 나를 질식시킨다.
-
그러나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화에서 여백이 그림의 일부이듯이, 우리 삶에서 비어있음은 충만함의 다른 이름이다. 여백은 숨쉴 수 있는 공간이며,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며, 존재할 수 있는 여유다.
다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결국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진정한 리셋은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무엇이 진정 필요한지,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지를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
미니멀리즘은 결국 선택의 예술이다. 무엇을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놓아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 이러한 선택들이 축적되어 우리의 삶의 질감을 만든다.
소유의 풍요로움이 존재의 빈곤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현대인이 배워야 할 새로운 생활의 기술이다. 여백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며, 미니멀리즘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적 풍요로움이다.
필요한 것은 정리하고 버려주는 서비스가 아니라,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를 알아보는 안목이다. 그리고 그 안목은 오직 여백 속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