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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13화

욕망의 지도

소비에 대하여

by 조융한삶




우리는 생존한다. 그리고 과시한다.

이 두 동사 사이의 거리가 현대인의 실존적 좌표를 결정한다.


샤넬 매장 앞 긴 줄은 단순한 대기열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서열이며, 동시에 불안의 증명서다.

벤츠 S클래스를 1년간 기다리는 시간은 소유의 지연이 아니라 신분의 예약이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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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자본은 차이를 생산한다.


봉건제의 신분이 혈통으로 고정되었다면, 자본주의의 신분은 소비로 유동한다.

더 교묘하고, 더 잔인하다. 혈통은 운명이지만 소비는 선택인 양 가장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사주를 "19세기의 꿈의 집"이라 불렀다. 오늘날 쇼핑몰은 21세기의 꿈의 집이다. 유리와 네온사인으로 포장된 욕망의 신전에서, 우리는 매일 자신도 모르는 기도를 올린다. "나를 증명해달라"고.


광고는 시다. 상품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노래한다.


명품 브랜드의 광고에 등장하는 것은 가방이나 시계가 아니라 '되고 싶은 나'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샤넬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샤넬백을 든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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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욕망을 단죄할 수는 없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문제는 욕망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인가, 자본이 나에게 원하게 한 것인가.


초기 자본주의가 지리적 식민지를 필요로 했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정신적 식민지를 요구한다.


매체는 매일 새로운 필요를 발명한다.

어제까지 없어도 살 수 있었던 것들이 오늘은 없으면 안 될 것들이 된다.


우리의 내면은 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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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말하면서 차별을 꿈꾸는 모순.

이것이 현대인의 분열된 의식이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면서 엘리트 브랜드를 탐한다.

연대를 외치면서 배타적 소비를 즐긴다.


이 분열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다.

우리 안에 공존하는 두 개의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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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적 소비를 가볍게 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적 몸짓이며, 동시에 사회적 언어다.


소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욕망을 부정할 수도 없다.

다만 멈춰 생각할 수는 있다.

이 선택이 정말 나의 것인지, 이 욕망이 정말 내 안에서 싹튼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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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보들레르는 "현대적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길어내는 것"이라 했다.

소비의 일시적 쾌락에서 삶의 영원한 의미를 길어내는 것, 그것이 현대인의 과제다.


우리는 모두 욕망하는 존재다. 문제는 무엇을 욕망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욕망을 욕망하느냐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찾을 것인가, 나의 시선 속에서 나를 만들어갈 것인가.


소비하기 전에 한 번쯤 물어야 한다.

이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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