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경제적 자유'라는 이름의 유령이.
경제, 경영·자기계발 베스트셀러
교보, 알라딘, 예스24, 밀리의 서재
유튜브, 탈잉, 크몽, 클래스101, 카톡 광고
어디를 봐도 '돈 버는' 얘기가 즐비하다.
그 방법으로 실제로 돈을 벌고, 그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 돕는다면 분명히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적 자유'라는 키워드 때문에
직장인을 비롯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현재 자신의 처지를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와 늘 함께하는 키워드는 '파이어족'이다.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의 'FI'와 조기은퇴(Retire Early)의 'RE' 를 합쳐 'FIRE'
이른 나이에 은퇴를 계획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직장생활을 비롯한 노동을 빨리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판단하고,
탈출하지 못하는 현재를 괴로워한다.
나는 이 현상을
'노동 기피 현상' 혹은 '노동 평가절하 현상' 이라고 부르고 싶다.
보통 '노동'이라고 하면
막노동, 뙤약볕, 야근, 외노자 등 부정적 어감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행하는 모든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의미하며,
생존은 물론이고 나아가 일하는 기쁨과 의미, 보람까지 느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분위기는 나만 특별히 피해가지 않았다.
몇 년간 만족스럽게, 즐거운 태도로 임하던 내 일이
'경제적 자유' 라는 단어에 꽂힌 순간, 급격한 '권태'가 찾아왔다.
나에게 의미와 보람, 가치를 줬던 일이
어느새 '탈출'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겨웠다.
일을 탈출의 대상으로 느끼게 된 순간부터
나는 인생뿐만 아니라 직장에서까지도 부조리함을 느끼는 하나의 시지프스가 되어버렸다.
시인을 봐도, 화가를 봐도, 어떤 예술가를 봐도,
사랑을 논하는 작가를 봐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학자를 봐도,
존경심보다는 "아 저 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 따위의 생각만 들었다.
연금 복권처럼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으로 휴양지에서 놀고 먹으며
산책하고 사색하고 낮잠 자고 독서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제적 자유'라는 파도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삶을 상상하자 그 파도 위에서 서핑하듯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맴돈다.
'경제적 자유' 자체는 당연히 나쁜 게 아니다.
다만 '노동 기피 현상'이
'일의 의미'를 빼앗아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