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자유 vs
알라딘 서점 검색창에 '경제적 자유'를 입력하면 139개의 결과가 나온다. '정신적 자유'는 2권이다. 이 숫자의 차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139대 2라는 압도적 격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파이어족이 되는 법, 이른 은퇴의 기술, 투자의 비밀들. 서점 진열대를 가득 메운 이 책들은 모두 하나의 약속을 한다. 돈으로부터의 해방. 그런데 정작 돈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왜 여전히 돈을 말하는가. 100억을 소유한 이가 친구에게 밥을 사면서 '아깝다'고 느낀다면, 그는 과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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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라는 말은 이 시대의 주문이다. 전문직도, 공무원도, 사업가도, 연금생활자도 똑같이 외운다.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부랑자가 끝없이 기다리듯, 우리는 충분함이라는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올 수 없다. 충분함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습관적으로 계산한다. "이거 밖에서 사먹으려면 얼마야", "이거 집에서 해먹으면 얼마밖에 안 하는데." 그들은 집도 땅도 차도 소도 있지만, 마음은 늘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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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이센스는 "절대 안 무너질 건물이 영혼보다 단단해 훨씬"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건물은 지진에도 무너지고, 시간 앞에서도 무너진다. 반면 단단한 영혼은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면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간디는 총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영혼을 갖는 일은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마음챙김과 명상, 알아차림과 깨어있음. 이런 고전적 수행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은 발전해도 욕망의 구조는 동일하다.
유튜브에서 만나는 자연인들의 삶은 정말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할까. 속세의 편리를 포기하고 불편을 선택한 이들의 얼굴에는 묘한 평온이 있다. 필요한 게 없기에 욕심낼 것도 없고, 줄 것으로만 가득한 삶. 이것이야말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보여준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조르바는 말했다. "보스, 나는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문장의 힘은 소유의 포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만족의 발견에서 나온다. 매순간 충만하기에 매순간 감사한 삶. 이런 삶 앞에서 편리로 가득한 만족의 결핍은 얼마나 초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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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1000억을 소유한 채로 떨며 사는 삶과 100만 원으로 태연히 사는 삶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자유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로 결정된다.
139대 2라는 책의 비율은 우리 사회의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경제적 자유에 대한 과도한 열망이 오히려 정신적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 자유롭게 노니는 삶은 통장 잔고와 무관하다. 오히려 통장 잔고에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결국 자유는 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놓아줌의 문제다.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느냐의 문제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적 자유에 관한 독서를 더 해야 하는 이유다. 139권의 경제서가 주지 못하는 것을 단 2권의 정신서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게 필요한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는 많이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다. 이 역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