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유 vs
하나의 유령이 이 땅을 떠돌고 있다. '경제적 자유'라는 이름의 유령이.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출현을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유령은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이 유령은 해방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소외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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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경제·경영 베스트셀러들, 유튜브와 각종 플랫폼을 점령한 '돈 버는' 콘텐츠들. 어디를 봐도 FIRE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꿈이 펼쳐진다. 이들이 그리는 세계에서 노동은 탈출해야 할 감옥이고, 일은 참아내야 할 고통이며, 진정한 삶은 그 너머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풍경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릴케는 말했다. "미래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훨씬 전부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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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의미와 보람으로 가득했던 일이 '탈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우리는 시지프스가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지프스보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카뮈의 시지프스는 적어도 자신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했지만, '경제적 자유'의 유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그 의미마저 상실한 채 바위를 밀어 올린다.
노동이 단순히 생계수단으로만 인식되면서, 일의 본래적 의미가 기술복제 시대에 소멸한다. 그 안에 깃든 창조의 기쁨과 연대의 가능성, 자아실현의 통로로서의 가치가 은폐되고 있다. '노동 평가절하 현상'라는 이 시대의 징후다.
흥미롭게도 이 현상은 역설적 구조를 띤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지만, 그 일 자체는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휴양지에서의 한가로운 오후를 꿈꾸며 야근을 하고, 진정한 삶을 위해 현재의 삶을 유예한다. 자유를 향한 충동이 도리어 새로운 구속을 만들어낸다. 이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부정변증법'의 현대적 변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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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한때 그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던 우리가 이제는 "저 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는 부러움만 느낀다면, 이는 단순한 가치관의 변화가 아니라 감수성의 빈곤을 의미한다. 예술의 숭고함보다 경제적 성취에만 주목하는 시선은,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을 황폐화시킨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서 다른 모든 가치를 잠식해 가는 데 있다. 마치 자본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듯이, '경제적 자유'라는 관념이 일의 다층적 의미들을 단일한 차원으로 평면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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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다.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실존적 필요다.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노동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더 풍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찾아가야 할 몫이지만, 적어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경제적 자유'라는 유령에 온전히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유령은 언제나 실체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유령이 가리키는 지점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의미들이다. 그것이 노동의 존재론적 가치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