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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10화

상처와 깨어있음

깨어있음의 무게

by 조융한삶





절간의 신발들은 가지런하다. 이는 하나의 증명이다. 매순간을 의식으로 채운 삶이 남기는 흔적들의 증명. 그들에게 신발을 벗는 행위는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하나의 의례이며, 그 의례 안에서 몸과 마음은 저절로 질서를 찾는다.


반면 우리의 신발들은 어떠한가.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며 현관을 지나치다가 어지럽게 벗어던진 운동화들, 급한 배달 알림에 서둘러 끼우다가 한쪽만 거꾸로 놓인 구두들, 넷플릭스 자동재생에 정신을 빼앗긴 채 짝짝이로 흩어진 슬리퍼들. 이 모습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이다.


우리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을 포기했다. 디지털 스크린의 무한한 콘텐츠 스트림이 우리의 주의력을 산산조각 내고, 그 조각들 사이로 현재 순간은 물처럼 빠져나간다. 우리는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니까. 깨어있는 것이 괴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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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사과를 깎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가장 집중력이 필요했던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가장 부주의했다. 집중이 흐릿해진 순간 칼날은 엄지 끝을 스쳐 지나갔다. 작은 붉은 선이 그어졌다.


고통이 나를 현실로 소환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칼의 무게, 사과의 단단함, 손가락 끝에서 번지는 따끔함. 2초 전까지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유튜브 화면 속인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차원인가.


우리는 언제나 작은 상처를 통해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몸이 먼저 깨어나고, 마음이 그 뒤를 따른다. 통증이라는 원시적 신호가 스크린에 빼앗긴 의식을 순식간에 현재로 끌어당긴다. 마치 전자기장에서 철가루가 자석 주변으로 일순간 정렬되듯이.


개탄스럽다. 왜 상처를 입어야만 깨어날 수 있는가. 왜 고통이 없으면 현재에 머물 수 없는가. 이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결함인가, 아니면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병리적 증상인가.


발가락을 문턱에 찧는 순간, 다리를 떨다가 무릎을 테이블에 부딪히는 순간, 계단을 오르다가 헛디디는 순간. 이 모든 작은 사고들은 우리가 얼마나 부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물리적 증거들이다. 몸이 마음보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식이 스마트폰 화면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몸은 여전히 중력과 관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의식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훑어보고 있을 때, 몸은 여전히 문턱과 계단의 실재성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 부딪힘이 우리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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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칠 때마다 베인 손가락 끝이 아리다. 이 아픔은 현재형이며, 현재형 안에서 나는 비로소 타이핑하는 행위를 의식한다. 각 글자를 누르는 힘의 세기를, 손가락과 키 사이의 거리를, 화면 위로 떨어지는 문장들의 무게를. 상처가 나를 깨워놓았다.


그런데 이런 깨어있음이 얼마나 갈까. 밴드를 붙이고 며칠이 지나면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 또 스마트폰을 보며 다리를 떨고, 또 유튜브를 보며 부주의하게 칼을 들고, 또 인스타그램 릴스에 정신이 팔린 채 문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발가락을 찧는다.


중독되어 있다. 디지털 자극에, 즉석 만족에, 끊임없는 산만함에 중독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중독자가 그렇듯이, 중독을 부인한다. "나는 필요할 때만 본다", "나는 통제할 수 있다", "이건 정보 습득이다."


하지만 현관에 어지럽게 놓인 신발들이 진실을 말해준다. 현재 의식 상태를. 얼마나 부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얼마나 자동조종 모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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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술은 무한한 연결을 약속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의 연결은 끊어놓았다.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현재에서 멀어지고, 타인의 디지털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의 발밑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넘어지고, 자꾸 부딪히고, 자꾸 베인다.


스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한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매순간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있다는 것도 하나의 연습이다. 근육을 단련하듯이, 매일매일 의식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연습.


손가락 끝의 상처가 아무는 동안, 나는 이 작은 아픔을 나침반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 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렬하는 것, 사과를 깎을 때 칼날에만 집중하는 것, 문턱을 넘을 때 발끝을 의식하는 것.


이 모든 작은 실천들이 쌓여서 하나의 태도가 되고, 그 태도가 쌓여서 하나의 삶이 된다. 나는 더 이상 상처를 통해서만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고통 없이도 현재에 머물고 싶다. 아픔 없이도 의식적으로 살고 싶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부주의해질 것이고, 다시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더 빨리 깨어날 것이다. 상처가 작아질 것이다. 무의식의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조금씩 더 의식적으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가장 절실한 과제다. 절간의 가지런한 신발들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작은 상처와 함께 이 연습을 계속한다.


더 많이 깨어있기 위해서. 더 많이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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